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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역사의 시험

박경진 2012. 2. 21. 03:47



[문창극 칼럼] 역사의 시험

[중앙일보] 입력 2012.02.14 00:00 / 수정 2012.02.14 00:00

문창극 대기자
역사에도 시험이 있다. 한 시절을 매듭짓고 또 한 단계 올라가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역사의 굽이굽이가 그 증거다. 시험을 통과하면 한 단계 더 높은 나라가 되지만 통과하지 못하면 그때부터 쇠퇴의 길을 가게 된다. 요즈음 우리가 그 갈림길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룬 나라라고 칭찬을 받아왔다. 그러나 이제 보니 칭찬받는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부담으로 변해가고 있다. 역사가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나라를 원했고 이루었다. 그러나 요즘 벌어지는 일을 보면 우리가 바라던 민주주의가 이런 것이었나 회의가 든다. 이 나라는 선거에 목을 매었다. 선거가 최고의 가치인 나라로 변했다. 선거 때만 되면 나라가 뒤집어지듯 소용돌이친다. 선거에 이기는 일이라면 나라를 파는 일까지 서슴지 않을 정도가 됐다. 마치 조선의 당쟁이 되살아난 듯하다. 바로 엊그제 통과시킨 한·미 FTA를 파기하겠다고 나섰다. 국회의원 수십여 명이 외국 대사관 앞에 가서 조약 파기를 시위하다니 이게 정상인가? 그들에게는 국제적 약속이나 신의도 중요치 않은 단어가 됐다. 표가 된다는 판단이면, 권력을 잡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저지른다. 이런 나라를 어떻게 믿고 무슨 조약을 맺자고 할 것인가? 개인끼리의 약속도 신의가 바탕이 되거늘 하물며 국가 간의 조약을 어찌 이리 가볍게 다루는가?

 정권교체가 될 때마다 이전 정부가 해놓은 것을 몽땅 뒤집어 놓는다면 우리는 매번 제자리걸음만 할 것인가? 영국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이념이 다른 정당이다. 대처 총리가 집권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던 기간산업의 국유화 정책을 자유화로 바꾸었다. 노동당의 국유화 정책이 국가경제에 부담을 주어 영국 경제를 쇠퇴시켰기 때문이다. 대처 집권 10여 년 후에 다시 들어선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정부는 정권이 교체됐다고 국유화로 다시 돌아섰는가? 아니다. 블레어 정부는 대처의 조치를 승계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했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지난 정부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다. 쌓은 것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수정하여 보완하는 것이다. 그래야 역사에서 축적이 가능하다.

 복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경제적 번영을 이룬 나라다. 그 열매가 자라면 당연히 나누어야 한다. 더욱이 한 번으로 끝나는 나눔이 아니라 지속적인 나눔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니 피자판의 크기가 계속 커져야 나눌 조각도 커지는 것이다. 그러자면 성장이 지속되어야 한다. 한데 이 당연한 이야기가 지금 이 나라에서는 피하고 싶은 화제가 됐다. ‘성장’이라는 단어를 내놓았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분위기다. 우리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립심,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을 미덕으로 알아왔다. 그런 정신 덕분에 다른 나라들을 제치고 경제성장을 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맺기 시작한 열매를 익기도 전에 따 먹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복지가 삶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권력을 잡는 수단이 됐다. 그 결과 남의 탓만 하는 사회가 돼버렸다. 경제성장이 퇴영을 씨앗으로 뿌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온 시절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바랐던 민주주의는 권력만능의 나라가 아니었다. 각자의 재능대로 맡은 자리에서 자기 책임을 다함으로써 나라 전체가 커지고 발전하기를 꿈꾸었다. 그런데 근무평점이 꼴찌에 가까운 판사가 무슨 낯으로 그렇게 뻔뻔스럽게 나올 수 있으며, 상대후보를 돈으로 매수하고도 의인을 자처하는 교육감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뻔뻔스러울까? 그들이 믿는 것은 권력이다. 정권이 바뀌면, 권력을 잡게 되면 게으름도, 부정도, 선이 되고 정의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법부가, 언론이, 공무원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그게 한 단계 높아지는 민주주의다. 그래야 나라가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권력에 휘둘리면 안 된다. 경제는 경제대로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시장경제다.


 우리는 바라던 대로 민주주의 나라도 됐고, 이만하면 경제적으로도 형편이 펴 가는 나라가 됐다.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고 나니 시험이 온 것이다. 우리 복이 이 정도에서 끝날 건지 아니면 더 뻗어갈 건지 기로에 서 있다. 그래서 역사의 시험대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혼란에 발목 잡혀 한때 반짝했다가 스러져 간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반듯하고 부강한 나라, 모범적인 나라가 될 것인가. 역사의 시험은 선택이다.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시험의 통과 여부가 결정된다. 그래서 역사의 진로는 우리 책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