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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구 목사(1875~1950) |
1875년 5월3일 충북 청주군 미원면 금관리에서 태어난 신석구(1875∼1950)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유교의 가풍 속에서 자라 22세 때 결혼하였다. 고향 친구인 김진우와 동업한 전당포 사업이 5년 만에 파산하여 친구 대신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후인 1906년(31세)에 상경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우연히 김진우를 다시 만나 전도를 받고 고랑포로 가서 성경책을 읽으며 기독교를 연구하다가 개종하게 된다.
그후 1907년 7월부터 고랑포교회에 출석하는데, 그 무렵 고랑포교회를 방문한 정춘수 전도사와 만나게 된다. 신석구 목사의 고향 친구인 정춘수는 1875년 2월 11일 신석구의 출생지와 30리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충북 청주군 회원면 두산리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26세 때(1901년) 고향을 떠날 때까지 유학을 공부했다. 정춘수는 ‘구국운동’에 헌신하고자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원산으로 가는데 거기서 여관집 주인에게 전도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후 1904년 6월 선교사 하디에게 세례를 받고 1906년 9월 개성북부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목회하고 있었다.
이후 신석구는 정춘수에게 이끌려 개성으로 가서 리드(W.T.Reid)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는 어학선생을 했다. 그리고 1908년 왓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그해 4월부터 협성성경학교에 입학하였다. 1917년 6월 남감리회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교회의 잦은 이동과 어려운 형편 탓에 신학교는 14년 만인 1922년에야 졸업했다. 신석구 목사는 어느 날 친구 오화영 목사로부터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러나 "목회자로서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것인가?", "천도교나 불교와 연합하는 것이 옳은가?"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하늘의 음성을 듣고 2월 27일, 33인 중 가장 늦게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 8개월 동안 수감되어 고난을 겪다가 1921년 출옥한다.
한편 1938년은 신사참배의 핍박이 절정을 달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신석구 목사도 수시로 불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반면 정춘수 목사는 감독이 된 후에 1941년 3월10일 혁신교단을 만들어 친일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감독을 통리자로, 목사를 교사로 바꾸고 감리교 연회를 해산하고 대신 교구를 만들었다. 총독부의 징병제도 실시에 동조하는 내용의 공시문을 발표하고, 일본어로 설교할 것과 구약전체와 신약의 계시록을 읽지 말 것, 찬송가에서도 전쟁이나 평화, 메시야나 재림에 관한 찬송을 삭제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또한 국방헌금을 실시할 것과, 전국 34개 교회를 폐쇄하고 그 부동산을 매각하여 ‘감리교단 애국기(愛國機)’ 3대를 헌납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노골적인 친일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목회자들은 제명, 출교 혹은 휴직, 퇴직 처분하였다.
이러한 친구의 변절을 지켜보다 못한 신석구는 1944년 여름, ‘소고기 두 근’을 들고 정춘수의 집을 찾아갔지만, 정춘수는 친구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편 신석구 목사는 8.15해방을 용강경찰서에서 맞았다. 해방 후 유사리교회에 복귀하였지만 곧이어 들어온 공산주의 세력으로 인해 혹독한 고난의 길을 가야만 했다. 교회를 지키겠다며 북쪽에 남았던 신석구는 1949년 '진남포 4.19사건'에 연루되어 10년형을 선고 받고 인민교화소에 수감된다. 유엔군과 국군에 의해서 10월 19일 교화소의 문이 열렸으나 그를 찾지는 못했다. 다만 교화소 안에서 10월 10일 총소리가 났다는 누군가의 증언으로 그즈음 순교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실에 순응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종교적 신념으로 ‘올곧게’ 살았던 신석구의 삶은 그렇게 마감되었다. 이처럼 신석구 목사는 감리교 목사로, 독립운동가로,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으로, 젊은 시절 다짐한 기독교의 신앙과 믿음으로 76세의 나이로 순교할 때까지 일신의 안녕을 위해 민족과 조국을 져버리지 아니하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투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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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3.1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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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충북도청과 청주시가 우암산 자락에 삼일공원을 조성하면서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한 6인(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 정춘수)의 동상을 세웠다. 그런데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열풍으로 1996년 2월, '친일목사' 정춘수 동상은 강제 철거되어 지금은 빈 좌대만 남아 바로 옆의 신석구 목사의 동상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