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77.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 전남 최초 교회- 양동교회

박경진 2010. 12. 17. 14:26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 전남 최초 교회- 양동교회
2010년 12월 15일 (수) 14:16:49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양동교회는 구한말 여명기인 1897년 봄, 미국남장로교 유진 벨(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와 매서인인 변창연 조사가 지금의 양동교회 자리인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어 목포교회의 출발이 되었으며, 전라남도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1년 만에 신자가 30여명이 되었으며, 1906년에 당회를 구성하면서 신자가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배유지 선교사는 양동교회 초대 목사로, 1903년 9월에는 목포의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우는 등 학교설립에도 앞장섰다. 1901년 벨 선교사의 부인 로티 여사가 목포에서 어린 남매를 두고 심장마비로 3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양동교회 성도들은 1903년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석조 예배당을 신축하면서 로티 선교사의 정신을 기리며 '로티 위더스푼 기념교회당'이라 불렀다. 1904년 12월, 배유지 선교사가 광주지역 선교를 위하여 떠나게 되자, 목포지방 선교구역은 존 프레스턴(John F. Prestom JR. 한국명: 변요한) 선교사가 맡았고, 이후 해리슨(W.B Harrison, 하위렴)선교사를 거쳐 1909년 제4대 당회장에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을 하였다.

 

윤식명 목사는, 양동교회 최초의 한국인 목사이자,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호남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인 당회장이 된 인물이다. 부임 이듬해인 1910년, 106평 규모의 교회를 세웠는데 교인들이 유달산의 돌을 직접 날라 주춧돌을 세우고 외벽을 만들었다. 신앙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의 목회자와 신자들이 직접 올려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가 된 것이다. 올해로 건립 100년이 된 정방형의 석조 교회당은 지금도 대예배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종탑 부분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등록문화재 제114호).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목포에서도 세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이른바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는 ‘4·8 만세운동’의 중심에 개신교, 특히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학생들이 있었다. 일본 경찰은 양동교회 이경필 목사(제8대 당회장), 곽우영 장로, 서기견, 서화일 집사 등을 검거했는데, 서기견 집사는 출감 직후 사망하기도 했다.

 

1926년 제10대 목사로 박연세 목사가 부임한다. 박 목사가 전남노회장으로 있던 1938년 제30회 전남노회 때 신사참배를 결의하게 되는데, 그는 1942년 7월 7일 중일전쟁 5주년 기념예배시, 주일 설교 때 ‘약육강식’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을 규탄하는 설교를 하여 투옥되었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재판관의 심문에서 “예수가 재림하면 천황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여 천황모독죄로 1942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목포, 광주형무소를 거쳐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944년 2월 15일 동사로 감방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1953년 총회의 분열로 양동교회는 기독교장로회로,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을 지지한 세력들은 양동제일교회로 각각 분리 되었다(양동제일교회는 호남동 6번지에 성전을 신축하고 1992년 11월 헌당예배를 드렸으며, 1997년에는 100주년 기념비를 세웠다). 양동교회 마당에는 1986년 처음으로 목포지역 교회가 모두 모여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고 선교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 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목포선교107주년 기념비, 박연세 목사 순교기념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본당 출입문은 남녀 신자들이 각각 다른 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양측에 두 개, 정면에 두 개가 있었는데, 종탑을 세우면서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다. 출입문의 윗부분의 태극 문양도 이채롭다.

 

이처럼 양동교회는 전라남도 최초의 교회이자 호남의 최초 자립교회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목포지역에서의 3.1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는 등,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을 겪어온 민족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로서 의미도 크다. 내부적으로도 교단 분열 등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양동교회는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