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림 그린 화백 김학수 장로
김학수(金學洙, 1912~2010) 장로는 모태신앙으로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의 학력은 신흥학교 4년 졸업이 전부다. 청소년기에는 평양 경창문밖교회와 장대현교회를, 장성한 후에는 서평양교회(당시 박대선 목사 시무)를 다녔다.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던 그는 1937년 ‘묵난 작품으로 일본 동경 남화회전’에 당선되면서 서서히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1939년에는 이정란을 만나 결혼했다. 1942년 이당 김은호(金慇鎬) 화백의 문하생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여기에 선전(鮮展)을 비롯해서 여러 번 입선을 했다.
6·25전쟁이 나자 머지않아 수복한다는 말만 믿고 가족을 남겨두고 혈혈단신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였다. 당시 부산에서 피난민들이 중심이 되어 부산시온교회를 창립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자 동대문에 서울시온교회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로 1967년 서울시온교회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며,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풍물과 조상들의 생활 풍속을 담은 예술성이 짙은 그림을 발표하는 데 정력을 쏟았다. 또한 이런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독교 미술인으로서 성화 풍속도에 정력을 쏟기도 했다. 그는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아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이때 신세계화랑에서 ‘한국풍속화’ 전시회를 가졌다.
혜촌(惠忖) 화백의 독특한 성화는 한국적인 성화로서 예수 주변의 인물과 배경을 모두 우리 한국의 것으로 하였는데 오직 예수만은 유대인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 그려 놓았으며 주변의 청중들은 모두 한복을 입은 그림으로 한국 토착화 작품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의 성화는 교계신문의 성탄절과 부활절 특집호, 교계잡지의 표지화로 많이 등장하면서 더욱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혜촌의 주요 작품들을 보면 풍속화로는 ‘시장도(市場圖)’, ‘능행도(陵幸圖)’가 있고 역사화로 ‘한양도(漢陽圖)’와 ‘경복궁도(景福宮圖)’가 있다.
역시 그가 장로로 활동하고 있기에 한국적인 성화는 독특한 면이 있다. 여기에 예수의 일대기 연작으로 30점이 있으며, 기독교한국선교역사화 37점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남대문에 입성하시는 예수님’, ‘문 두드리는 예수님’ 등이 있다. 1984년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을 맞이해서는 100점을 완성하여 발표도 하였다. 이렇게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도 북에 두고 온 부인과 자녀들(2남2녀)을 잊지 못해 기도할 때마다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부인과 자녀들의 이름을 애처롭게 불렀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북에 있는 가족들을 부르면 영감이 떠올랐고 붓이 가는 데로 성화(聖畵)를 그렸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한창 거론될 때, 6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북에 있는 가족에게 지상안부를 띄우는 편지를 소개하였다. 그 편지를 읽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려의 연락이 쇄도하였다.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의 격려로 그의 활동 무대는 점점 넓어져 1972년 미국 캔터키 루이스빌대학과 디트로이트웨인대학의 초청으로 미국 5개 도시에서 순회 전람회를 하였다. 미국인교회뿐 아니라 한인교회에서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979년 뉴욕에 있는 한인들을 중심으로 뉴욕한국화랑에서 초대전을 갖기도 하였다. 그의 성화를 일부 사람들만 보기에 아깝다고 생각했던 박대선 당시 연세대 총장의 부탁으로, ‘예수의 생애’라는 주제로 40점을 비롯해서 ‘선교’라는 주제로 23점, ‘의료와 교육’이란 주제로 23점, ‘순교 박해’란 주제로 8점을 그려 완성하였다. 이상의 모든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 모든 성화 저작권 및 출판권을 진흥문화사 회장인 박경진 장로에게 위임공증서를 작성하여 넘겨 주었다. 그리고 박경진 장로는 이 모든 성화를 엮어 한 권의 성화집으로 발간하였다.
혜촌 김학수 성화집은 모두 4부로 분류되었다. 여기에 다 소개를 할 수는 없지만 한국기독교역사와 직접 관계 있는 부분을 소개하면, ‘선교’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오신 예수님’ ‘예수께로 가면 기쁘리로다’ ‘하멜의 제주도 도착’ ‘최초의 소래교회’ ‘귀츨라프 선교사의 상륙지인 고대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제물포항 상륙’ ‘대동강변 노방전도’ ‘평양 장대현교회’ ‘평양 남산현교회’ ‘정동교회’ ‘새문안교회’ ‘상동교회’ ‘강화읍 성공회’, 그리고 서상륜·이수정·김창식·길선주·최봉석 목사, 조만식 장로 등 인물과, 교육의료파트는 ‘평양 숭실학교’ ‘예수학당’ ‘배재학당’ ‘이화학당’ ‘보구여관(이대부속병원)’ ‘광혜원’ ‘YMCA 회관’ ‘평양 장로회신학교’ ‘감리교협성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이 있다. 끝으로 ‘순교와 박해’의 장면은 ‘천주교 새남터’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장면’ ‘3·1운동의 현장이었던 제암교회’ ‘주기철 목사의 순교 장면’을 모두 편집하여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엄청난 작품을 남긴 김학수 장로는 끝내 그리던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그나마 미국에서 북한을 왕래했던 이승만 목사를 통해 가족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김학수 장로는 자신의 성화를 북한 가족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자녀 중 북한에서 화가로 부친의 대를 있고 있다는 소식도 듣기도 하였다. 김 장로는 결국 가족들을 먼 훗날 하늘나라에서 만날 것을 주님께 부탁하고 서울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그는 장학회를 조직하여 많은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 중 대형 성화는 경기도 용인시 추계리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입구에 초대형 성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성화는 1866년 9월 4일 병인박해 시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 대동강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지만 관헌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은 것으로, 이곳을 순례하는 모든 순례자에게 새로운 은혜를 전하고 있다. 이 성화는 서울 상동교회에서 기증하였다. (2010.12.11.한국장로신문/김수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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