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여명을 밝힌 숭실학당(숭실대) 설립자 베어드 선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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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드(W.M. Baird, 1862~1931 한국명: 배위량)는 미국 인디아나 주에서 출생했다. 1885년 하노버 대학,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원래 중국선교사로 갈 예정이었으나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베어드는 아내와 함께 1891년 1월29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틀 후 인천항으로 들어와 다음날인 2월3일 서울에서 개최된 북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부산지부 선교사로 공식 임명되었다. 북장로교는 부산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본인 거주지 밖에 있는 영선현의 땅을 매입하였고, 베어드는 1891년 9월 부산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베어드의 사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는 초량교회(구. 영선현교회)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한국 최초신자였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 서경조, 황해도 장연 출신 고학윤 등, 초기 전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지방과 전주, 목포 등 전라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를 하였다.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개화기 한국에서 두 자녀를 풍토병으로 잃었다. 부인 안애리(Annie L.A. Baird, 1864~1916) 선교사는 미국에서 암치료를 받다가 남편의 사역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온 뒤 숨을 거뒀다. 이처럼 베어드 선교사 부부는 복음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와서 열악한 환경과 싸우며 희생하기까지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특별히 우리가 일제강점기로 미래가 안 보일 때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들을 길러내어,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근대국가의 기본 틀을 다질 수 있었다. 이 땅에 와서 젊음과 생명을 다 바치고 자녀들의 목숨을 거룩한 제물로 바치기까지 희생한 그들은 죽어서도 이 땅에 묻혀 묘비로 남아 있다. 이들의 삶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곳에서 예배하는 삶이 가장 영광스러운 삶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주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511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 한국기독교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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