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 봉화 척곡교회 - 국내 유일의 'ㅁ자형' 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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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봉화군 법전면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척곡교회는 초기 한국교회가 대부분 외국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것과 달리 일반신도에 의해 세워졌으며, 100년의 역사를 견디며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자생교회이다. 또한 초기 예배당이 대부분 ‘ㄱ’자나 ‘一’자 형태로 지어진 것과 달리, 정사각형을 띠고 있는 국내 유일의 ‘ㅁ’자형교회이며, 예배당과 함께 세워진 교육시설(명동서숙)도 보존되어 있다. 그는 서울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설교에 감흥을 받고 “일제의 사슬을 끊고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야소교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처가마을 봉화 유목동으로 낙향을 하였다. 그는 30리 길을 걸어 문촌교회를 다니면서 몇몇 신도들과 함께 기도실을 만들어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07년 5월 17일 마침내 척곡교회를 세우게 된다. 2년 뒤인 1909년 3월 29일에 9칸짜리 정방형 기와집 예배당과 6칸짜리 초가 명동서숙을 건립하였다. 남쪽 출입문도 처음에는 동서쪽에 문을 따로 내 남녀의 출입을 구분하였다. 예배실 가운데에는 광목을 쳐서 남녀석을 구분하여 예배를 드렸다. 가난한 산골신자들의 성미 쌀로 교회 살림이 유지되었으며 지금도 예배당 양쪽 벽엔 성미자루가 걸렸던 못들이 남아 있다. 한편, 예배당 앞에 위치한 명동서숙은 일제강점기 후진양성을 위해 지은 초가건물의 교육기관으로 신교육을 시행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성경과 국어, 산수, 한문을 가르쳤는데 당시 이 지역사람들 대다수가 이곳에서 공부했으며 암울했던 시대에 빛을 발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큰 몫을 감당하였다.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면서 목사안수를 받고 봉화지역 6개 교회의 시무를 맡는 등 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앞장섰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면서 일경들의 탄압을 받게 되고 명동서숙이 폐교되면서 신자들도 흩어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해방 후 부분적인 건물증축과 보수작업이 있었지만 산간벽지인데다 신자들도 대부분 도심으로 이전하여, 구국입국 교육입국 신앙입국을 실천하였던 옛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척곡교회를 잊지 말라.”는 조부의 유지를 받들어 장손인 김영성장로 부부가 2004년 낙향하여 교회를 지키고 있다. 봉화척곡교회는 한국선교 초기의 교회건축물 연구에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국내 유일의 'ㅁ자형' 교회로 2006년 6월 19일 문화재청지정 제2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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