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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71.> 강화 서도중앙교회 112년의 역사이야기

박경진 2016. 2. 19. 13:06

71. 강화 서도중앙교회 112년의 역사이야기


▲ 서도중앙교회


강화서도중앙교회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들어가는 주문도에 위치한 유서 깊은 전통한옥예배당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근대화시기에 여러 차례 외세의 침략을 겪은 곳으로 기독교선교역사에 빠르게 복음이 전파된 지역이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인천내리교회 신자 이승환이 1893년 강화도에서 존스 선교사가 자기모친에게 달밤에 선상세례를 베풀게 함으로부터 강화도의 선교역사는 시작되었다.

1893년 존스(Gerorge Heber Jones, 한국면 조원시, 1867-1919)선교사로 부터 복음을 받아 개종한 한학자 김상임과 주민들은 강화 최초로 교산교회를 설립하였다. 이후 홍의교회, 강화중앙교회 등 여러 교회들이 강화도에 세워지면서 복음은 강화도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강화도는 19세기 말 우리나라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할 때 전진기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서양인들의 선교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100년 이상 된 한옥예배당으로 지방문화재로 보존하고 있는 교회는 성공회 강화성당(1900년), 서도중앙교회(1902) 온수리교회(1906년)등이다.

 

1900년대 해마다 6월이면 만선이 된 고깃배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상인들, 그리고 어부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도둑, 술집 건달들로 북적이었다. 1902년 천주교 신자였던 윤정일이 주문도에 들어와 기독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기독교는 아직 생소할 때여서 사람들은 그에게 “야소교에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러나 1905년 교회성도들의 의식이 깨이면서 마음을 모아 신문화를 받아드리며 영생학교를 설립하였다. 신식교육을 실시하면서 부터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며 친일파에 대항하는 것을 보면서 주민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 설립 10년 만인 1912년에는 당시 주문도 전체가구 181호 중 136호가 교회에 등록하는 등 주민의 75퍼센트가 교인이 되었다.


▲ 서도중앙교회 새성전

이후 1923년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모아 한옥예배당을 신축하게 되었다. 정면에서 보면 2층 종루(鐘樓) 형태의 지붕을 갖고 있으며, 본당 쪽은 일반 한옥 형태로 옆에서 볼 때는 팔작(八作)지붕이며, 홑 처마집이다. 건물 안쪽은 중세기의 서양교회 양식을 하고 있으나 구조는 단순하다. 예배실로 쓰이는 좁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 중앙의 강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단 뒤에는 사제석이 마련되어 있다.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좌우 창은 서로 어긋나게 설치한 점이 눈에 띈다. 우리 전통 목조 건물의 가구형식을 바탕으로 서양교회가 지어진 모습으로, 동서양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78년 이 교회의 원래 이름인 진촌교회에서 서도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종루에 옛 이름인 진촌교회(鎭村敎會) 현판이 걸려 있다. 1997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90년이 넘은 이 예배당은 지금도 새벽예배 장소로 이용된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좌우로 두 곳인데 오른쪽 문은 여자가, 왼쪽 문은 남자가 이용하도록 되어있다. 지금도 이곳 성도들은 강단에서 볼 때 오른쪽 기둥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남자들이 앉고, 왼편에 여자들이 앉는다고 한다.

 

1920년대 강화도는 본섬을 중심으로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진촌교회 교인들도 거센 풍랑을 헤치면서 서너 시간씩 노를 저어 마니산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해 큰 은혜를 받았다.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도 믿으며 빚진 아웃들의 부채를 탕감해주는 초대교회의 순수한 믿음 생활이 재현되었다. 또한 주민들의 뜨거운 신앙 열정은 예배당 건립에 대한 소망을 갖게 했다. 교인들은 '한사람이 1원씩 헌금하기'운동을 펼치며 예배당 신축 헌금을 모았다. 인천 내리교회와 미국 연합감리회가 140원씩 지원한 280원을 포함하여 700여원의 건축헌금이 모아졌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7억여 원의 엄청난 금액이었다. 최고의 예배당 건축을 위해 목재와 기와는 황해도 해주에서 운반해 왔다. 배를 이용해 강화 본섬을 거쳐 응개지 포구까지 싣고 오면 소가 끄는 달구지로 공사 현장까지 운반했다. 바닷가에서 교회 터까지 무거운 건축 자재를 실어 나르던 길이 얼마나 험했던지 달구지를 끌던 황소 2마리가 죽어 나갔다. 그래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 길을 가다가 번제로 암소들이 바쳐 졌던 것처럼 성전 건축에 황소 두 마리가 제물삼아 봉헌된 예배당이라고 이른다.

 

이렇듯 주민들 스스로의 수고와 땀으로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지켜온 때문일까. 지금도 주문도 전체 200여 가구 중, 교회에 등록되지 않은 가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복음화 율이 높다. 주문도에는 술집뿐 아니라 그 흔한 노래방도 없다. 몇 년 전에 다방이 생겼으나 찾는 손님이 없어 몇 달 만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강화도는 섬이면서도 강화대교 등 계속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가 놓여 육지 같은 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가 되어 주셨듯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눈물로 그것을 지키며 토착화 시켜 온 강화의 기독교 역사는 우리를 과거의 산 증인인 신앙 선배들의 삶 속으로 이끌어 주며, 외딴 섬과 같이 하나님과 분리 되고 있는 우리의 신앙의 위치를 재점검케 한다.

 

-주소: 인천 강화군 서도면 주문도리 718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