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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66>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노리마쯔 목사와 동신교회

박경진 2016. 1. 12. 16:10

 

66.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노리마쯔 목사와 동신교회

 

▲ 노리마쯔 마사야스 기념비

 

수원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인 동신교회는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는 1830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플리머드형제단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승송(乘松) 목사’로 불리는 노리마쯔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는 일본 메이지학원 대학신학부에 재학하고 있을 때 플리머드형제단 소속, 영국인 브렌드(H. G. Briend)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그는 신학부를 중퇴하고 조선선교사로 나가기를 작정하고 출발준비를 하였다. 그는 1896년 조선의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사실을 알게 된다. 노리마쯔는 기독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조선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품는다. 그는 소망을 잃은 조선인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위로하고 상처를 싸매고자 다짐하며 그해 12월23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했다. 이는 일본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해외선교사역의 임무를 띠고 출발한 역사적인 사례다.

 

인천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가기 위해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던 노리마쯔가 하늘을 울 얼어 보면서 몇 번이고 감격적인 심정으로 "하나님! 하나님!"하면서 외쳤다. 기도하며 하나님을 부르짖는 광경을 쳐다보던 마부는 자기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외치는 줄 알고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첫 신자가 됐다고 한다. 노리마쯔는 서울에 도착하여 한 여인숙에서 그 주인의 도움으로 청년 조덕성을 소개받고 1897년 1월부터 한글을 배우며 노방전도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란 말만 들어도 돌팔매질을 하려는 때였다.

 

▲ 노리마쯔 마사야스(乘松雅休 1863~1921)

 

그는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하며 온갖 수모와 멸시천대를 받으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조선인들에게 전도하면서 일본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보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아들이 학교에서 조선 아이들한테 따돌림을 당하고 매를 맞아 울며 돌아오기도 했지만 믿음으로 감당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앙의 열정으로 선교범위를 넓혀가며 서울을 떠나 경기도 장호원까지 가서 전도를 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려 했으나 그를 맞아드리거나 재워 주는 사람이 없어서 어느 때는 시골집 굴뚝을 껴안고 눈물로 기도하며 잠을 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인내하며 조선인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에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를 드렸다.

 노리마쯔는 평소 한복을 즐겨 입었고 한옥에서 조선식으로 생활하면서 아들에게도 조선말을 가르치는 등, 조선인처럼 살았다. 그러던 중 조선선교사역의 영향을 주었던 영국인 브렌드(H. G. Briend)선교사가 1898년에 내한하여 서울지역을 맡게 되었다. 그 후 노리마쯔는 1900년 8월9일 수원 장안동으로 이주하여 9월에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로 하고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09년 8월 김태정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함으로,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이라 하였다. 1917년 일제 당국의 요청에 따라 마침내 '기독동신회(基督同信會)'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여 훗날 수원동신교회가 되었다.

 

▲수원동신교회

 

노리마쯔는 경제적으로는 아주 가난했지만 조선인을 위해서는 성경말씀대로 뜨겁게 사랑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찾아왔다. "점심식사를 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에 청년은 먹지 못했다고 했다. 노리마쯔는 즉시 아내를 불러서 “빨리 점심을 좀 대접하라”고 했다. 그러나 집안의 쌀독에 쌀이 한 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순발력 있게 밖으로 나가더니 머리카락을 잘라 시장에 내다 팔아 양식을 구해 손님을 대접하였다. 이 일로 한동안 그의 아내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다녀야 했다. 결국 일본의 보금자리를 뒤로하고 조선선교사를 자청하여 찾아왔으나 이방인이라는 멸시와 냉대를 극복하면서 복음전도에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그의 아내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두 자녀와 남편을 남긴 채 조선 땅에서 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노리마쯔는 경상북도, 충청북도 등 38개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는 등 열정적으로 사역을 펼쳤다. 한편 그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져서 결국 1914년 고향인 오다하라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하고 3차례나 수원교회를 방문하여 말씀을 전했으며, 1919년 3월1일에는 병든 몸으로 수원에 다시 와서 3.1운동을 높이 평가하며 조선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다시 병이 악화되어 1921년 2월 조선에 뼈를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1922년 동신회 수원교회 성도들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일본 오다하라까지 찾아가, 노리마쯔 선교사의 유골을 가져왔다. 그리고 수원교회 뜰에 그의 무덤과 기념비를 세웠다.

 

▲노리마쯔 목사 기념비

 

 

-주소 : 경기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16 수원 동신교회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