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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64>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 강경성결교회 (한옥북옥교회)

박경진 2016. 1. 8. 11:43

 

64.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진원지- 강경성결교회 (한옥북옥교회)

 

▲ 강경북옥교회

1910년 8월 29일 일본의 강압 아래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반포되면서 조선은 27대 순종을 끝으로 519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한일병합을 반포한 일제는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역사, 종교 등 모든 것을 일본화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중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 Shintoism)를 통해 천황을 신격화함으로써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려한 뻔뻔한 작태는 대표적인 일제의 만행으로 유명하다. 바로 일명 ‘신사참배(神社參拜)’가 그것이다. 1876년 개항 후 일본으로부터 ‘신도’가 전래되었으나 1910년 이전까지는 주로 일본 거류민들이 간간히 신사를 건립한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한일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마치 관-공립적 성격을 띠며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신사참배와 신도 신앙의 강요가 보편화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러한 폭압에 언론들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일제히 항거하면서 일시 보류되었으나, 결국 1935년 이후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탄압함으로써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게 했다

 

 

▲ 강경성결교회

 

 잠시나마 일본의 폭거를 멈추게 한 저항운동이 최초로 시작된 곳은 충청남도 강경에서였다. 당시 충청남도 강경은 국내 3대 포구 중 하나로 해상교통의 중요 요충지였던 탓에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민간에서 건립한 신사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역사유적지이면서 동시에 3·1 만세운동의 현장이던 옥녀봉 언덕에 ‘강경신사’를 지으면서 강경 사람들은 분노했다. 더욱이 1924년 10월 11일 강경신사 ‘제일(祭日)’에 맞춰 강경공립보통학교의 일반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신사를 참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사건이 발생했다. 즉, 강경성결교회 집사였던 김복희 여교사와 주일학교에 다니던 57명의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김복희 집사는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끝까지 저항한 학생 7명은 퇴학처벌을 받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기독교 잡지 <활천>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1924.10) 민족지로 이름 높았던 <동아일보>(1925.3.18.~19 사설)를 통해 다시 재론되면서 전국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결국 일제는 1912년부터 한국식민지배의 상징으로 서울에 건립해온 조선신궁이 1925년에 완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제도의 전면시행을 10여년이나 보류하다가 1935년 말에 이르러서야 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겉으로는 일반 사립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려는 강경성결교회의 저항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당시 강경성결교회의 사역자는 백신영 전도사(女)였는데, 그는 1919년 10월 17일 조직된 대한애국단부인회 결사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1920년 강경성결교회에 부임하였다. 백신영 전도사는 기독교 신앙을 전수할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강경지역 주민들이 애국애족의 정신을 함양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토대를 조성하였다. 결국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힘없는 여교사(집사)와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거부’라는 초유의 사건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신앙운동과 애국민족운동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 최초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비

 

한편 1910년 11월 내한하여 초대 성결교회 감독으로 봉직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1919년 3월 20일 강경에서 복음전도관을 시찰하던 중 일본군인과 순사들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다. 사건의 전말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도망치는 청년들을 뒤쫓던 일본군인과 순사들이 토마스 감독과 일행을 오인하고 일방 구타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영·일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었고, 결국 일본은 토마스 감독에게 상당한 위자료를 배상금 명목으로 지급하므로 합의를 할 수 있었다. 토마스 감독은 영국으로 돌아가기 전 일제로부터 받은 배상금 일부를 강경성결교회 최초의 예배당인 한옥 북옥교회의 건축기금으로 내놓았다. 비록 토마스 선교사의 피갑이었지만, 결국 교회를 탄압하던 일본의 자금으로 교회 건축이 이루어진 것과 그 교회가 다시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진원지’가 된 것은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강경성결교회는 1950년대 새로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했고, 원래 건물은 북옥감리교회가 양도받아 사용했으나 역사적 의의를 되살리고자 강경성결교회가 다시 양도받아 한옥강경북옥교회는 지방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되었다.

 

 강경성결교회 담임 신영춘 목사(19대)는 구전되던 이 사건을 <활천>과 <동아일보> 등의 옛 기사를 찾아 사실로 밝혀내고, 지난 2006년 9월 ‘최초신사참배거부 선도기념비’의 제막식을 가졌다. 강경성결교회 옆에 건립된 기념비에는 이 사건의 주역들과 신사참배를 하려고 줄지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일본제국주의가 부조되어 있다. 옆면에는 기념비건립 소사와 최초로 이 사건이 보도된 <활천>의 기사 원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기념비 아래에 세워진 64개의 돌기둥은 백신영 전도사와 김복희 교사, 그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을 의미한다. 이처럼 한국교회사와 애국민족운동사에 두루 기록될 강경성결교회는 오늘날 기독교 순례자들뿐만 아니라 애국애족의 뜻있는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교회의 성지이다.

 

- 주소 : 충남 논산시 강경읍 홍교리 129번지 강경성결교회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