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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59>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박경진 2016. 1. 8. 11:18

 

59.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 목포 양동교회

 

 

▲ 박연세 목사 순교기념비

 

 양동교회는(설립 당시 목포교회) 1897년 봄, 미국 남장로교 유진 벨(E. Bell,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와 매서인 변창연 조사가 만복동(현 양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배유지 선교사와 변창연 조사는 목포지역 선교를 위해 전도에 나섰고, 그 열매로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노학구, 김만실, 김현수, 임성옥, 지원근, 마서규, 김치도 등 20여명이 개종했다. 목포지역 복음화에 일로매진하던 양동교회는 배유지 선교사의 아내 로티 벨이 1901년 풍토병으로 사망하고, 이에 배유지 선교사가 어린 두 자녀(헨리, 샬롯)들을 누이에게 맡기기 위해 일시 귀국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1902년 10월 30일, 배유지 선교사가 재입국하여 한옥 기와집을 증축, ‘로티 위더스푼 벨 기념 교회당’을 봉헌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아 1903년에는 세례를 받고자 준비하는 교인이 101명에 달한다고 기록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동료인 의료 선교사 오웬, 스트레이퍼 등과 함께 목포병원과 정명여학교(여)와 영흥학교(남) 등의 교육기관의 틀을 세움으로써 목포지역의 복음화와 더불어 한국민의 계몽을 이끌었다. 이와 같이 헌신적으로 양동교회를 위해 열정을 다한 배유지 선교사는 1904년 12월 광주지역 선교를 위해 떠났고, 존 프레스턴(John F. Prestom JR. 한국명: 변요한) 선교사가 뒤를 이었다. 이후 해리슨(W.B Harrison, 하위렴)선교사를 거쳐 1909년 제4대 당회장에 평양신학교 2회 졸업생인 윤식명 목사가 부임을 하였다.

 

 

▲ 선교100주년기념비

 

 1905년 목포선교부가 폐쇄되면서 목포지역 선교는 재차 위기를 맞았으나, 양동교회는 선교사역의 불을 꺼뜨리지 않았다. 양동교회는 1906년 임무옥 장로를 임직시키면서 최초의 당회를 구성했고, 1907년에는 두 번째로 유내춘 장로가 임직하면서 사역을 확대했다. 목포는 당시 전국 6대 도시 중 하나이자 서남부지역의 요충지였던 탓에 사람들이 몰려, 교세는 4년 전에 비해 4배 이상 성장했다. 이러한 부흥은 인근 지방으로 이어져 1903년에 1개 군에 두 군 데에 불과하던 예배처소는 1907년 4개 군에 13개로 증가하였다. 결국, 변요한 목사의 요청으로 목포선교부가 재 설치되었고, 로라복 선교사와 맹현리 선교사가 부임하여 선교의 열정을 더했다. 1909년 양동교회는 세례교인 170명에서 성도가 550여명에 이르렀고, 목포선교부는 40개의 예배처소, 275명의 세례교인, 1천 여 명이 넘는 신자를 가진 서남부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다.

 

 한국에서 4번째로, 호남 지방에서는 최초로 당회장으로 부임한 윤식명 목사는 1910년 교인들의 뜻을 모아 오늘날 양동교회가 위치한 양동 127번지 864평의 대지에 121평의 석조 건물을 지었다. 당시 교인들은 일제의 수탈로 끼니를 거르면서도 7,100원을 헌금했고, 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유달산의 돌을 직접 날라다가 주춧돌을 세우고 외벽을 쌓아 올렸다. 믿음의 씨앗은 미국인 선교사가 뿌렸지만 교회는 한국의 목회자와 신자들이 직접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가 된 것이다. 성전 건립 후 100년이 지났지만 정방형의 석조 교회당은 지금도 대예배실로 사용되고 있으며, 종탑 부분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등록문화재 제114호). 한편, 양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19년 4월 8일 양동교회 이경필 담임목사(1917년부임, 6대당회장)와 성도들,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 등이 연합하여 목포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성도와 남녀 학생 200여명이 검거되고 그중 100여명이 구속됐다.

 

 

▲ 양동교회 전경

 

또한 일제 말기, 전남노회 노회장(4회)이던 박연세 목사(1926년 부임, 7대 당회장)는 제30회 전남노회 때(1938년) 신사참배가 종교가 아닌 국가의식이라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해 이를 수용했지만, 1942년 7월 7일 주일 설교 때, 중일전쟁 5주년을 기념하여 일제를 찬양하라는 지시를 어기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을 규탄하는 설교를 한 후 투옥되었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재판관의 심문에서 “예수께서 재림하면 천황도 심판을 받는다.”고 하여 천황모독죄로 투옥되어 목포, 광주형무소를 거쳐 대구교도소에 복역 중이던 1944년 2월 15일 감방에서 동사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었다.

 

이처럼 양동교회는 전라남도 최초의 교회이자 호남의 최초 자립교회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목포지역에서의 3.1운동에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는 등, 일제시대와 6·25전쟁 등을 겪어온 민족운동의 역사를 간직한 교회로서 의미도 크다. 내부적으로도 교단 분열 등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양동교회는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주소: 전남 목포시 양동 127 (담임 정기대 목사)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