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뉴스 한국교회사

<한국교회사55>농촌계몽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원한 상록수- 최용신

박경진 2016. 1. 6. 11:54

 

 

 

55. 농촌계몽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한 영원한 상록수- 최용신

 

▲ 최용신 선생(1909~1935)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기념 문예당선작품인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1909∼1935)은 1909년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감리교 선교사가 운영하던 원산의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928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에서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황에스더 교수를 만났다. 그로부터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민족의 밑거름이 되라’는 가르침을 받고 재학중 두 차례(1929년, 1930년 여름방학)의 농촌실습에 나섰던 최용신은 가난과 무지로 피폐한 농촌의 현실에 많은 자책과 갈등을 겪게 되고, 결국 학업을 중단한 채 1931년 10월 경기도 화성군 반월면 샘골(천곡 泉谷, 현 상록구 본오동)에 YWCA의 농촌지도원(농촌사업부 파견교사)으로 파견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한 첫 걸음이었다.

 

 

▲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최용신의 뒷모습

 

최용신은 가난으로 글을 배울 기회조차 없었던 농촌 사람들의 문맹퇴치를 위해 10월 2일 조그만 샘골교회 예배당을 빌려 강습소를 시작했다. 그녀는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품고 헌신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하나님ㆍ부모ㆍ이웃 사랑을 바탕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는 농민이 되어야 함을 깨우쳤다. 그러나 농사일에 몰두해야 할 아이들이 헛바람이 들까봐 우려한 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에 최용신은 마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지주 염석주의 집을 찾아갔다. “농사를 지으면 1년 수확을 얻는데, 사람을 가르치면 백년수확을 얻는다.”라고 하며 설득하는 처녀의 당찬 말에, 재산 모으는 일에만 몰두하던 부자 염석주의 마음이 움직였다.

 최용신은 한글·산술·재봉·수예 등을 가르치고 위생 등의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등 농촌계몽에 힘썼다. 낮에는 아이들 밤에는 부녀자들을 가르쳤고, 수업이 끝나면 이웃마을로 가서 교육한 후 새벽에 돌아왔다. 방학 때는 인근의 시골교회를 순회하며 가르쳤다. 처음에는 무관심과 냉대로 외면하던 주민들도 점차 편견을 꺾게 되었고, 처녀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본경찰의 감시와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헌신적인 노력으로 섬기는 최용신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감동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점차 인원이 늘어 오전, 오후, 저녁의 3부제로 가르쳐야 했다. 최용신은 더욱 활발한 계몽운동을 펼치기 위해 강습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932년 5월 ‘천곡(샘골)학원 건축 발기회’를 조직하였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고 건축에 참여했으며, 유지들의 토지기부와 YWCA의 보조가 더해져 1933년 1월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가받은 ‘천곡학원’의 성대한 낙성식(落成式)을 거행할 수 있었다. 

▲ 샘골교회

 

 

천곡학원 등 농촌운동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을 무렵, 최용신은 돌연 유학을 결정한다. 그것은 현재보다 좀 더 실천적이고 발전된 농촌계몽운동이 필요함을 깨달은 탓이다. 이를 위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함을 느낀 최용신은 1934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고베여자신학교 사회사업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여자의 몸으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과로에 시달리다가 각기병에 걸려, 결국 유학 6개월 만인 그해 9월 귀국해야만 했다. 좌절 속에 돌아온 그녀는 처음에는 고향(원산)으로 가려했지만, 샘골 사람들의 간곡히 요청에 발길을 돌려 샘골로 돌아왔다.

기력을 회복하며 계몽운동에 전념하던 최영신에게 시련은 그치지 않고 닥쳐왔다. 1934년 10월, YWCA보조금이 완전히 중단된 것이다. 운영난에 빠진 천곡학원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대책이 없었다. 수원농고에 재직하던 친구(류달영)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그 와중에 미처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해 이듬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리고 1935년 1월 23일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정성에도 불구하고 2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 최용신기념관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등의 유언이 남겨졌다.

 최용신은 일제 암흑기에 기독교 신앙을 따라 자신의 전 생애를 농촌계몽에 바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 이다. 특히 “나라를 되찾으려면 공부를 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며 아이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킨 교육가이자 독립 운동가였다. 샘골마을 아이들을 ‘조선의 빛’ 혹은 ‘조선의 싹’이라 부르고, 조선어가 국어임을 가르쳐 조국에 대해 크게 눈 뜨게 하였고, 일제로부터 농촌마을을 지키고 농촌을 사랑하는 정신과 신앙을 지킨 최용신 선생은 이 민족의 영원한 ‘상록수’이다.

정부는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했으며, 2007년 11월 20일에는 ‘샘골강습소’가 있던 곳에 ‘최용신기념관’이 건립되어 그의 정신을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미담으로, 그 기념관이 건립되는 데에 선생의 강습소 제자였던 홍석필 옹이 15,000만원을 아낌없이 기탁하기도 했다. ‘최용신기념관’이 있는 상록수공원에는 루씨유아원과 천곡교회, 최용신 묘소 등이 있다(향토유적 제18호). 그리고 안산 상록수역에서 ‘최용신기념관’으로 가는 길을 ‘최용신거리’라고 명명하였다.

 

-주소: 안산시 상록구 해빛나길 56번지(본오동 879-4) 상록수공원 내 『최용신기념관』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