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54> 목포공생원과 윤치호전도사-윤학자여사 부부의 삶
54. 목포공생원과 윤치호전도사-윤학자여사 부부의 삶
▲ 목포 공생원 전경
목포 유달산 아래에 위치한 아동복지시설인 ‘공생원’은 일제 치하인 1928년에 외국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전도사 윤치호가 설립한 곳으로 의미가 매우 크다.
윤치호는 1909년 6월 13일,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부락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부친을 여의고 소년가장이 되었으나 미국 여선교사 마틴(Jullia Matrin)의 도움으로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여, 이후 전남 최초교회인 목포 양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당시 목포는 부산, 인천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항구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항구 주변은 수많은 걸인과 고아들이 넘쳐났다. 이 시기에 목포에 온 청년 윤치호는 7명의 부랑아들을 데려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고, 1928년 10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로 ‘공생원(共生園)’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부랑아들의 외모를 보는 주민들과의 마찰로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다가, 1930년 4월에 목포 유지들과 양동교회의 도움으로 대반동에 목조건물로 원사를 신축하여 1932년 12월 15일에 정식으로 ‘공생원(共生園)’ 설립인가를 받고, 이후 1937년 4월 죽교동(대반동) 현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공생원 설립10주년이던 1938년 10월 15일, 윤치호는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1912-1968, 한국명 윤학자)와 결혼을 했다. 당시 윤학자 여사는 목포의 선교사들이 세운 정명여학교의 음악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공생원의 음악교사로 와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윤치호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한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목포에 진입하였을 때 이들 부부는 ‘고아들을 두고 우리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는데, 이로 인해 인민군 치하에서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인민재판에 회부하였다가 마을사람들의 변호로 풀려났지만, 대신 공생원을 점거하여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강제로 설치하고 죽교동(대반동) 공생원 원장에게 강제로 인민위원장직을 맡겼다. 그러나 9월말 목포에서 인민군이 후퇴한 후에는 이제는 도리어 인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체포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억울한 사정이 밝혀져서 무혐의로 1951년 1월 석방되었지만, 공생원의 생계유지를 위하여 얼마 후 식량구호 요청을 하기 위해 광주의 도청에 간다고 나갔으나 끝내 행방불명되고 말았다(당시 42세).
그래도 윤학자 여사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공생원의 원아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삶의 고난을 겪지 않아도 되는데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고아가 된 공생원의 원아들을 위하여 지극정성을 쏟으며 돌보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공생원의 원아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아보던 그는 마침내 1968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일본사람으로서 자기민족이 아닌 한국인 고아들을 위하여 생명이 다하기까지 희생과 봉사로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의 장례는 목포의 최초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신문기사에 “3만여 명의 조객이 모였고, 목포가 다 흐느껴 울었다”고 적고 있었다. 1965년 제정된 목포 시민의 상 제1호 대상자가 일본인 윤학자 여사였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지역민의 존경과 애정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1963년에 박정희대통령으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1967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써 한일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공생원 교회 입구의 윤학자관에서는 윤치호, 윤학자의 평생의 사역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고 있으며, 마당에는 2003년 10월 15일 제막된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흉상이 조각된 “사랑의 샘” 기념비(비문= 아! 인간을 사랑하는 것만을 생각하던, 두 분이여! 사랑의 샘이여! 여기서 편안하게 쉬소서) 등 여러 기념비들과 초창기 사용되었던 오래된 종도 볼 수 있다.
▲ 윤치호 선생, 윤학자 여사 흉상
이처럼 공생원은 아이들의 먹을거리 마련을 위해 동냥을 마다하지 않아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 전도사, 그리고 내 민족 내 부모조차도 버렸던 아이들을 위해 30여 년간 3,000여명을 돌본 ‘고아들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가 평생을 바쳐 고아사랑을 실천한 곳이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고아 7명을 거둬 ‘함께 사는(共生)’ 세상을 열고자 했던 윤치호 전도사의 정신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공생복지재단은 현재 이들 부부의 외손녀 정애라 씨의 운영으로 67명의 원생이 생활하고 있으며 아동, 장애인, 노인복지 등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주소 : 전남 목포시 죽교동 473번지
사진-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