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45>.평북 선천의 기독교사에서 양전백과 매쿤 선교사
45. 평북 선천의 기독교사에서 양전백과 매쿤 선교사
▲ 양전백 목사(1870-1933)
초기 한국 교회의 눈부신 발전과 성장의 중심에 평북 선천이 있었다. 평양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찾아가 입교한 노효준은 1896년에 선천으로 돌아왔고 나병규는 1897년에 귀향했다. 그들은 초 신자였으므로 고향친구인 조규환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드러내면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런 그들의 노력으로 선천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이때 휘트모어(N.C. Whittemore, 위대모)선교사가 선천 선교지부 개설의 책임을 맡아 1898년 선천읍교회를 설립한다. 그리고 1901년부터는 의료선교사 샤록스(A.M. Sharocks)와 함께 선천에 상주하며 선교를 하였다. 선천읍교회는 1902년 조직교회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양전백을 장로로 처음 장립하면서 교회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그 후 양전백장로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1907년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 최초목사 7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11년에 이르러서는 교인이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천읍내를 가로지르는 장천(長川)을 경계로 해서 기존의 선천읍교회는 선천북교회로 하고, 다른 하나는 선천남교회로 나뉜다. 선천북교회에서 다시 1930년에 중앙교회가 분리되어 나왔고, 선천남교회에서 1931년에 선천동교회가 분리되면서 선천의 기독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선천은 2만의 인구와 4천여 호의 작은 읍 지역이었지만 60% 이상의 기독교인은 주일과 장날이 겹치면 장이 서지 못할 정도였다. 또한 4교회(북/남/동/중앙교회)가 연합으로 성경공부를 하였고, 공부가 끝나면 비공식 모임을 통해 교회 발전을 논의하곤 하였으며, 교회연합으로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당시 선천에도 구국의 이념으로 설립된 학교들이 여럿 있었는데, 특히 양전백목사가 1906년에 세운 신성중학교와 1907년에 세운 보성여학교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의 오산학교와 더불어 민족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한일병합 후, 1911년의 ‘105인 사건’도 신성중학교가 그 발상지였다. 선천의 안명근이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암살하려던 사건을 일본총독부에서는 윤치호, 이동녕, 이승훈 등이 조직한 비밀 항일단체인 신민회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몰아붙였다. 이를 빌미로 항일민족세력을 제거하고자 신민회 인사들과 평안도 일대의 북장로교 교인을 다수 체포하였다. 이때 기독교학교인 신성중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되었고,양전백 목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2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에는 선천 기독교청년회(YMCA)가 만들어져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3·1운동 때도 선천의 남·북교회와 신성중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벌이므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당시 북교회의 담임자였던 양전백은 독립운동 33인중 1인이었으며, 남교회의 김석창도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선천기독교는 민족의 장래에 대한 절대적 의무감으로 민족운동을 이끈 애국 단체였다.
한편, 1909년 조지 매쿤(George S. McCune, 1878~1941.12.7 윤산온(尹山溫))이 선교사로 선천에 부임한다. 1905년 9월12일 미 북장로교 교육선교사로 한국에 온 그는 1909년부터 신성중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인재 양성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기틀을 잡았다. 학교에 와서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입학의 기회를 주었고, 평소 재목이 될 만한 학생은 일단 중국의 기독교계 학교로 보내서 영어를 공부하게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초대총장을 지낸 백낙준(白樂濬)도 신성중학교 출신이었는데 매쿤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유학을 할 수 있었다.
▲ 한국최초 7인 목사 (뒷줄 좌부터-방기창, 서경조, 양전백) (앞줄 좌부터 한석진, 이기풍, 길선주, 송린서)
매쿤선교사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에도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05인사건’의 주동자로 연루된 바도 있었던 그는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돕고 협조했다는 이유로 1921년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미국 휴런대 학장으로 있으면서도 한국유학생들을 돕다가 1928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의 교장으로 청빙되어 다시 한국에 왔다. 매쿤은 숭실전문학교장 재임시절,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신앙 양심으로서는 신사에 참배할 수가 없습니다. 신사예식에는 이방신들이 경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며 거부하였다. 이 일로 그는 1936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숭실전문학교 교장직 파면을 당하고 3개월 뒤 또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어 돌아갔으며 안타깝게도 매쿤선교사는 194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그에게 건국공로훈장과 문화훈장을 수여하면서 그의 공로를 높이 기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평북 선천은 미 북장로교 선교지부의 복음전파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선교사들을 통한 교육 및 의료선교(미동병원, 1905년 설립)로 말미암아 일찍부터 서양문물과 신교육을 받아들인 관계로 애국자와 선각자를 많이 배출하여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온상지가 되었다. 선천은 한국의 주변부에 불과하였으나,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므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한국근대화의 요람, 한국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