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44>.호주선교의 아버지- 겔슨 엥겔(왕길지) 목사
44.호주선교의 아버지- 겔슨 엥겔(왕길지) 목사
▲ 겔슨 엥겔(1868-1939)
호주 장로교회는 미국의 북장로교회, 남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와 함께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4대 장로교 중 하나이다. 1889년 호주인 데이비스가 첫 발을 내디딘 후, 120여명의 호주 선교사가 한국 땅을 밟았다. 이 중 엥겔 목사는 1900년 10번째로 한국에 와 37년간 머물면서 초기 경상남도의 교회설립과 평양신학교 교육에 주춧돌을 놓은 호주선교사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하며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한국이름 왕길지 목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겔슨 엥겔(Gelson Engel. 1864∼1939)은 1868년 독일 남부 부르텐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교사의 꿈을 안고 뉴 팅겐에서 사범대학 과정을 이수하고 스위스 바젤과 영국 에든버러에서 각각 문학과 신학을 전공했다. 사범학교 재학시절 한 선교대회에 참석했다가 ‘내적 확신’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부터 선교사로 헌신을 다짐한 그는 1892년 6월 바젤선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인도에 가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역시 인도에서 선교사로 있던 호주 감리교 목사의 딸 클라라 바스(Clara Bath)와 결혼을 하였다.
그는 1898년 감리교선교부로 이적을 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6년간의 인도 선교를 접고 호주로 돌아갔다. 호주에서 하바드 칼리지(빅토리아주 소재 스토웰 위치)교장으로 2년간 봉사를 하면서도 처음 인도에 도착 했을 당시 “40년 동안 선교사로 일하겠다.”고 서원했던 ‘마음의 빚’을 안고 있던 그에게 한국 선교의 기회가 찾아왔다. 때마침 빅토리아 장로교회 여선교연합회(PWMU)가 한국에 파송할 능력 있는 선교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인도에서 6년 간 선교한 경험이 있던 그가 적절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그리하여 엥겔은 그의 나이 32세이던 1900년 9월19일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멜버른을 출발하여 10월29일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오자마자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그는 한국에 온지 불과 27일 만인 11월25일 주일예배 때 조선말로 축도를 하여 한국교회 신자들을 감동시켰으며 3~4개월 후인 1901년 초에는 한국어로 설교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언어실력을 과시 하였다. 그는 ‘엥겔’과 발음이 비슷하게 지어진 이름 ‘왕길’에, ‘최고로 좋은 뜻’을 전한다는 의미를 덧붙인 왕길지(王吉志)를 자신의 이름으로 정했다.
그는 아담스와 부산, 경남지역 선교사역을 협의하여 아담슨은 마산과 거창, 진주를 중심으로 경남 서부지역을 담당하기로 하였고 본인은 울산과 함안 등 동남부지역을 맡기로 하였다. 엥겔은 그동안 여선교사들이 어렵게 유지해 오던 주일 집회를 정식 교회로 발전시키며 부산진교회를 설립, 1914년까지 담임하였으며, 역시 여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된 동래 일신여학교 운영을 맡아 초대 설립자이자 2대 교장(1902~13)으로 봉직 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회 총회장(1913), 그리고 경남노회장(1917)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 클라라는 한국에서 질병을 얻어 1906년 4월 호주에서 수술을 받다 36세의 짧은 생을 마치며 세상을 떠났다.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슬픔과 고독을 챙길 겨를도 없이 당시 평양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왕길지 목사는 10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휴가를 얻어 호주에 머물면서 한국 선교에 대한 구상을 다시 정리하고 가다듬었다. 그는 이듬해인 1907년 7월3일 안식년 휴가를 맞아 귀국한 부인의 친구이자 여선교연합회 소속 선교사로 그보다 먼저 부산에서 활동하였던 브라운(A. Brown)을 만나서 조선의 에서 함께 일하기를 약속하며 재혼을 한 후 다시 부산에 복귀하였다
▲ 부산의 왕길지 목사의 집 1910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평양신학교의 강사로 매년 3개월씩 강의해왔는데 1919년부터는 전임교수로 청빙을 받아 평양에 상주하면서 귀국할 때까지 신학교육에 전념하여 성경언어 및 교회사 교수, 도서관장 등으로 봉사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첫 선교사 교수였으며, 특히 1918년 창간된 「신학지남」의 초대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27회에 걸쳐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 《구약전서 개역》(1936) 출판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역사편찬과 문서출판, 교재집필, 성경번역 등의 다양한 문서사역을 활발하게 펼쳤다.
▲ 신학지남
왕길지 목사는 1938년 70세가 되어 31년간 성실하게 봉직했던 평양신학교 교수와 선교사직을 마감하고 은퇴하여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갔는데 이듬해인 1939년 5월 7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가 첫 선교지 인도에서 드렸던 기도처럼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창 12:1) 호주와 한국 등에서 43년 동안 선교사로, 신학자로 누구보다도 언어에 능숙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면서 일생을 선교지에서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한국에 머물던 37년 동안 신비주의 은사, 음악, 특별한 어학적 재능 등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선교사로, 신학교수로 필요한 곳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였다. 그의 아끼던 제자 중 104세의 방지일 목사가 지금도 그를 증언하고 있다.
-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