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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37.>오산학교와 남강 이승훈 장로의 교육열과 나라사랑

박경진 2016. 1. 6. 10:35

 

<한국교회사 37.>오산학교와 남강 이승훈 장로의 교육열과 나라사랑

 

▲ 남강 이승훈 장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承薰 1864~1930) 선생은 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운 교육자이자 독립 운동가이고 또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가 민족정신 고취와 인재양성을 위해 사재를 털어 설립한 학교가 바로 오산학교이다.

 

  평안북도 정주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한 이승훈은 11세에 평양의 한 유기상회에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후에는 자신이 직접 유기점을 설립하여 경영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근면성과 성실성은 인근에까지 소문이 날 만큼 정평이 난데다, 노동환경을 개선하고 근로조건을 제고하고, 또한 근로자들을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함으로써 민족기업가로서 크게 성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4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고 이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그의 사업장은 전화를 입고 말았다. 후에 다시 자본을 빌어 상점과 공장을 재건하여 크게 성공하였으나 다시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업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마저 박탈당하자 좌절과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중, 1907년 7월 우연히 도산 안창호의 ‘교육진흥론’이란 강연을 듣게 된다. “교육으로 백성을 일깨우지 않으면 독립도 있을 수 없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회개하고 민족을 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곧바로 세 가지를 이행했다. 첫째, 상투를 자르고 술 담배를 끊었다. 둘째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 들여 고향에 오산교회를 세웠으며, 셋째로 국민교육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느끼며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한편, 이승훈은 독립운동가로서도 활동했는데, 먼저 1907년 안창호가 신민회를 조직할 때 참여하였고 1911년 105인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4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그러다가 56세 때는 기독교 대표로서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중 하나로 가담하였다. 그는 “안방에서 편히 죽을 줄 알았더니 이제야 죽을 자리를 얻었구나.”라며 되레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내 종교, 종파에만 빠져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도외시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신앙을 경계했는데, 민족대표 서명을 앞두고 자기 종교인을 먼저 써야 한다며 좌충우돌하자,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먼저 쓰면 어때. 의암(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이름을 먼저 써”라며 천도교에 첫 자리를 양보했고 장로교 대표 자리마저 길선주에게 내 주었다.


  독립선언식이 끝나자마자 일본 헌병들에 의해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검거된 이승훈 선생은 감옥생활 중에 구약성경은 10번, 신약성경은 40번 읽었고, 마치 기도하기 위해 일부러 감옥 안으로 들어온 사람처럼 철저히 기도생활을 하면서 감옥 실내청소와 변소청소를 도맡아 했다고 한다. 늘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그는 모범을 보였는데, 오산학교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 날 변소에 가 보니, 꽉 차오른 오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오물을 치우기 시작했는데, 이를 본 학생들이 자신들이 치우겠다고 하자 이승훈 선생은 “열심히 공부하는 일은 여러분의 몫이고, 이런 청소는 내 몫입니다. 장차 모두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될 인재들에게 이런 일로 시간을 빼앗기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했다는 고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1907 오산학교 설립 당시 첫 건물인 경의재                           ▲1922 오산학교 제1교사 건물 모습

 

 

  1907년 평북 정주에 세워진 오산학교(현 서울 오산중, 고교)는 7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설립자 이승훈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는 “지금 나라가 날로 기우는데 그저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총,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배움을 가지고 깨어나고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7명의 학생밖에 없지만 차츰 자라나 70명, 700명에 이르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일심협력하여 나라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합니다.”라고 당부하며 오산학교를 통해 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웠다. 그러한 노력 덕분에 오산학교는 시인 김억, 김소월, 백석, 화가 이중섭, 목사 주기철, 한경직, 언론인 홍종인, 사상가 함석헌 등 민족의 일꾼을 무수히 길러냈다. 특히, 이승훈이 옥중에 있는 동안 교장직을 맡았던 고당 조만식 선생은 9년간이나 학교를 이끌면서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유영모 선생 등과 함께 주기철 목사,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 등의 인재를 배출했다.


  오산학교는 지식만 가르치지 않고 기독교 신앙교육을 접목하여 구한말 썩고 병든 한국 사회를 일깨우는 데 중요한 역할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처음 7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배출한 인물들과 그들이 해낸 역사적 업적들을 기억한다면 한 사람이 심은 밀알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오산학교는 오늘날에도 남강 이승훈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소: 서울 용산구 보광동 168번지 오산중고등학교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