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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35>참혹한 6.25전쟁의 비극과 구림교회 순교자들

박경진 2016. 1. 6. 10:29

 

 

35. 참혹한 6.25전쟁의 비극과 구림교회 순교자들

 

 

 구림교회는 1922년 구림공립보통학교 교장의 사모였던 김숙자가 김학동, 이신흥 등과 함께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에 예배 처를 마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교회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복음의 확산을 바라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졌고 해방을 맞으며 나라의 재건과 자립을 위해 힘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영암지역도 9개 교회를 중심으로 사랑의 나눔이 아름답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 영암 구림교회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의 불법 남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은 평화롭던 영암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다. 영암지역은 월출산의 험준한 산세로 인해 지방 공산당의 은거 지와 빨치산의 중요한 활동거점이 되었다. 유달리 우익성향이 강하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컸던 이 지역에 인민군들이 남기고 간 상처는 남도지역 어느 곳보다 깊고 컸으며, 교회가 당한 참화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북한 공산군이 밀물처럼 들이닥쳐 휩쓸고 지나간 후 해남군, 강진군, 장흥군에서 빨치산들이 월출산으로 모여든 것은 10월 초순이다. 이때부터 구림교회당을 불태우고 교인과 우익인사들을 잡아들였다. 최의순(73·영암신복교회)권사의 어머니인 당시 구림교회 김정림 집사도 공산당에 연행되어 큰 도로변의 주막집에 감금되었다. 이미 그곳에는 구림교회 18명의 신도들과 면내의 우익인사 6명이 끌려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주막집에 감금된 채 두려움 속에서 하루 밤을 지새웠다. 공산당들은 잡혀온 구림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준다”고 거듭 회유하고 협박을 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신앙을 지켜왔던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신앙을 저버리는 ‘불신앙’ 대신에 당당하게 순교의 길을 택했다.

 

 1950년 10월4일 아침 일찍이 어머니에게 아침식사를 갖다 드리기 위해 주막집으로 향하던 최의순 권사는 멀리보이는 주막집에서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음을 발견하며 깜짝 놀랐다. 공산군이 성도들을 가두고 집을 포위한 채 불을 지른 것이었다. 불길에 몸부림치는 비명소리는 1km밖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히려 ‘찬송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는데 “내 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감금된 이들 중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죽음 앞에서는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절규하고 있었다. 이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오히려 우렁차게 흘러나오는 찬송가 소리와 함께 부르짖는 기도 소리에 놀란 인민군들이 되레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 순교비와 28인 합동묘

 

 이날의 참화로 구림교회 성도들18명이 순교를 당했다. (집사- 김정님, 노형식, 장성례/ 성도- 노병철, 노병현, 최경애, 최기우, 이이순, 김덕경, 김창은, 김흥호, 김치빈, 김상락, 김봉규, 천양님/ 성명미상- 3명) 1950년 10월 7일에는 우리국군과 경찰 등 선발대가 영암읍을 수복하자 궁지에 몰린 공산당은 애국지사와 대한청년단원, 교인 및 양민 등 28명을 군서면 구림리 신근정 민가에 가두고 불을 놓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처럼 처참하게 최후를 마친 원통한 넋을 위로하고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950년 10월 10일 바로 그 자리에 합동 묘를 만들었으며 후일 잿더미 속에서 뼈들을 모아 합장묘를 이루며 장례를 치렀다. 그 후 27년 만인 1976년에 다시 넓은 자리로 옮겨 공산당의 잔인한 만행을 규탄하면서 억울하게 숨져간 이들의 넋을 기리며 합장묘로 장례를 치르고 구림고등학교 앞에 순절비(殉節碑)를 세워 잔혹무도한 공산당의 만행을 상기케 한다.

▲ 순절비와 28인 합동묘


 순절비가 애국지사를 포함한 일반인 희생자를 위한 것이라면, 순교비(殉敎碑)는 신앙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분들을 위한 것이다. 합동묘소와 순교비는 구림면 전체 순교자들을 위하여 2000년에 영암군교회협의회 주도로 순교자 학살 현장에 세워졌다. 순교비에는 영암읍교회 25명, 상월교회 26명, 구림교회 18명, 천해교회 7명, 삼호교회 2명, 서호교회와 매월교회 각 1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9. 28서울이 수복된 후 북으로 도주하던 패잔병, 빨치산들은 전쟁막바지까지 우익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이 때문에 영암군은 6.25를 지나면서 13만 인구가 8만으로 줄어들었고 이 지역 여섯 교회에서 82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등, 영암지역은 전쟁의 아픈 상처가 가장 깊게 남아있는 곳이다. 지금도 이곳 신앙의 후손들은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순교자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기도하면서 당시의 참상을 회고한다. 그리고 순교자의 피로 지킨 교회의 전통과 뿌리 깊은 순교신앙의 긍지를 갖고 복음 선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주소: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301

 

- 글: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