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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29>청주 탑동양관과 충북선교의 아버지 밀러선교사

박경진 2016. 1. 6. 10:03

 

29. 청주 탑동양관과 충북선교의 아버지 밀러선교사

 

▲ 청주 제일교회

 

청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세기말, 신대리 마을주민 오천보 등 3명이 행상을 다니다가 우연히 경기도 죽산군 ‘둠벙리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부흥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은혜를 입고 마을로 돌아와 어설프지만 받은 은혜를 나누며 전도하면서부터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외국 선교사가 아닌 주민들 스스로의 신앙심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세워지는 최초의 예배공동체로서 신대교회가 탄생을 하였다.

 

 마침내 충청북도에서 처음으로 조직교회가 시작하게 된 것은 청주에서 1904년 밀러(F. S. Miller1866-1937, 민노아閔老雅)선교사와 김흥경 등에 의해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가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밀러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1892년 한국에 들어와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893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가 되었고 그가 맡으면서 학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쳤다. 그리고 자신의 교육방침대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이때, 안창호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열정적으로 힘을 썼다. 그리고 1895년, 연동교회가 탄생하게 될 때 그 기초를 놓는 역할도 하였다.

 1904년부터 충청북도 청주에서 최초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 하던 중, 사랑하는 아내 안나 밀러를 잃게 된다. 교회를 세우고 기초를 닦으면서 밀러선교사는 1904년 제3대 정동 여학당장인 도티와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또다시 도티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매진하면서 세 번째 부인으로 다시 딘과 재혼을 하는 등 파란 많은 세월을 살았다.

 

▲ 4호 양관- 포사이드 기념관

 

 충청북도지방 최초선교사였던 밀러선교사는 청주지역에서만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신대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청주시내로 들어와 제일교회를 기점으로 열성적인 선교활동과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사업에 기여했다.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청서학교, 청북학교 등 6개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등, 선교와 근대 교육, 서양문화 보급 등에 매우 힘써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1936년 정년은퇴 후 개인적인 선교여행을 마치고 청주로 다시 돌아와 1937년 10월6일 71세로 생을 마칠 때 까지 한국에서 교육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현재 일신여고 양관 옆에는 한국인들에게 남긴 교육의 열정이 묘비에 새겨져 있다.

 

 

▲ 5호 양관-노두의 기념관

 

한편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생활거주와 선교사역과 교육활동 및 의료 활동 등을 위해서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주시 탑동 일신여고 안에 있는 최초의 서양식건물인 청주탑동양관(洋館, 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이다.
밀러 선교사는 카긴(E. Kagin, 계군桂君)선교사와 더불어 탑동 야산을 당시 26원에 사들였다. 거기에 나무를 베고 1906년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1930년 무렵까지 25년간 무려 5만여 평의 땅에다가 붉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서양식과 한식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양관 건물을 차례차례 들어서게 하였다.

당시 주민들의 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양관은 마침 1906년 충북지역의 대홍수 가 닥쳤을 때 탑동 언덕으로 피신했던 이재민 200여명에게 관사와 부속건물 일부를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한 위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청주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며 교육을 일시 중단시킨 적도 있었지만 청주 양관에서의 교육은 얼마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1950년도 6·25 전쟁 중에는 양관을 잔혹 무도한 인민군들이 쳐들어오면서 야전병원으로, 청주제일교회는 인민군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성도들이 공산당의 총칼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 순교했다. 현재도 교회당 외벽에 남아있는 총탄자국은 당시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청주제일교회 순교자들을 떠오르게 하며 숙연하게 한다. 현재 남아있는 양관은 총6동 중 한 곳(1호)은 개인소유로 변했고, 일신여중, 고, 교정에 자리 잡은 4채의 탑동양관(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은 생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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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종교를 앞세운 ‘예수꾼’으로 비쳐져 서민들 정서를 혼란시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교와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기독교 복음전파에 어려움이 많았던 청주지방에 세워진 양관은 개화기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의뿐 아니라, 충청북도 기독교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해방 전까지 충북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주탑동양관은 어려운 시대에 수난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북기독교 선교100년, 근대문화유산의 역사적인 이야기 거리와 100여년의 상징물로서의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

-주소: 충북 청주시 상당구 탑동 94-17

 

 글 : 진흥홀리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