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27> 한서교회와 한서(瀚西) 남궁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
27. 한서교회와 한서(瀚西)남궁 억 선생의 무궁화 사랑
▲ 남궁억 선생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으로 시작되는 찬송가 580장의 작사가로 친숙한 한서(瀚西)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에서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치만, 호는 한서(瀚西)였다.
그가 태어난 지 불과 3년 뒤에, 이 땅에 놀라운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영국 개신교회에서 파송되어 이 나라에 최초의 선교사로 온 토마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조선에 들어오다가 대동강 변에서 순교한 일이다. 만약에 그가 첫 선교사로 들어와서 살아남아 복음의 씨앗을 뿌려서 개화의 문이 활짝 열렸다면, 일제강점기와 같은 치욕적인 시대나 6.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다.
남궁 억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나이 스무 살 때부터 큰 뜻을 품고 신식 학문을 배우고자 재동에 있던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남궁 억은 외교관이었던 묄렌도르프 밑에서 일을 도와주며 궁내부 주사를 맡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의 수행원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를 거치는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의 방해로 그곳에서 2년간 머물기도 하였다. 1895년에는 궁내부 토목국장을 맡아 종로를 비롯해 서울의 중심가의 도로들을 넓히고 흥복사 절터에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아관파천은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관직에서 물러나,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에서 총무를 맡아서 <독립신문>의 영문판을 편집하였고, 1898년에 나수연, 유 근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그 공으로 사장에 취임하여 국민계몽과 독립협회의 활동을 도왔다. <황성신문> 사장으로 있으면서 러시아와 일본의 한반도 침략 야욕과 러‧일 협상에 반대하는 글을 실어 두 번이나 구속되기도 했다.
1905년 고종의 부탁으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해 하며 관직을 사임하였다. 1906년 다시 양양 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양양에 현산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07년 관직을 사임하고 오세창, 장지연 등과 함께 대한협회를 만들었고, 다음 해에는 관동학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1910년부터 9년 동안 배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우리 겨레에게 민족정신을 길러 주기 위해서는 교육이 중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남궁 억은 학생들에게 명주에다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각 도마다 한 개씩 무궁화를 수놓게 하여 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는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5년 후에는 평신도로서 목회자를 대신해 설교할 수 있는 ‘본처 전도사’(감리교 장로)의 직분을 받았다. 그리고 배화학당 교사로 민족교육에 힘을 쏟다가 56세 되던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로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모곡)로 낙향하였다.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보리울(모곡) 마을로 내려간 그는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그곳에 어린 무궁화를 심어 전국에 무궁화나무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또 <무궁화동산>이라는 노래를 지어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강제적인 장려정책을 펴고 있을 때, 남궁 억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무궁화심기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 장을 만들어 전국으로 묘목을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2일 시조사(時兆社)인 출판사직원을 사칭한 홍천경찰서 신현규가 남궁 억을 찾아와서 잡지를 팔며 무궁화 묘목을 사러 왔다고 말하자 그를 무궁화 묘포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무궁화가 우리나라 국화라는 것을 설명하며 사쿠라(벚꽃)는 활짝 피었다가 곧 지지만 무궁화는 연이어 피는 것처럼, 한국 역사도 그렇게 면연(綿延)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 후 무궁화노래와 무궁화나무가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경찰은 모곡학교를 수색했고 무궁화 묘목 8만주를 불태워 버리며 남궁억을 구속하고 모곡학교는 강제로 공립학교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무궁화동산사건>이다. 남궁억 선생은 이 사건 일로 1933년 11월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다 1935년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남궁 억선생의 믿음생활 22년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무엇보다도 교회진입로 오른편에는 한서교회, 왼편에는 2004년 6월에 개관한 <한서 남궁 억기념관>, 중앙에는 1998년 7월에 복원된 기념교회 건물이 세워져 있다. 기념관 안에는 십자가당 사건 취조장면을 재현했으며, 모곡학교 모형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남궁 억선생의 붓글씨와 저서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가 작사한 노래를 청취할 수 있는 코너도 있다.
또한 한서교회 앞에는 63종, 2,000여 그루의 무궁화를 심은 ‘무궁화동산’이 조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는 남궁 억선생 기념비가 서 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부터 불타는 애국심을 갖게 하시고 아무리 혹독한 박해를 당한다 하더라도 굳건한 믿음으로 잘 극복하게 하시고 변절하지 않으며 육으로나 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남궁 억선생의 지치지 않는 애국 애족의 민족혼은 위와 같은 기도문에 잘 나타나있다.
▲ 한서 남궁억 기념관
무궁화를 통해 꺼져가는 민족정신을 되살리려 한 남궁 억선생의 사상은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민족정신과 신앙심을 깊이 일깨워 주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 보급에 앞장선 참된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었다.
-소재지 :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2리 386 (담임 현재호 목사)
-글 : 진흥투어, 한국기독교성지순례선교회 회장 박경진 장로 (02-2230-5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