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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23>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와 승동교회 이야기

박경진 2016. 1. 6. 09:35

23.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와 승동교회 이야기

 

                                             박서양              사무엘 무어        승동교회

                                                                (모삼열)선교사

 

 

 

한국 기독교 선교 초기에는 개화의 돌풍과 맞물려 일어난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다. 박성춘 역시 그러한 사건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1862년 서울 관자골(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백정은 칠 천반(七賤班)이라 불리는 하류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백정은 인구조사에서도 제외되었고, 거주지역도 제한되어 있었다. 상투를 올릴 수도 없고, 망건이나 갓을 쓰는 것도 금지당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망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미성년의 표시로 여겨졌기에 백정은 나이가 많아도 아이 취급을 당하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아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백정마을에서 백정의 딸과 결혼을 한 박성춘에게는 봉출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만큼은 백정 처지를 면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들을 천주교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천주교 학교에 내야 하는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그를 곤당골 예수교학당에 보냈다. 1892년에 입국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무어(모삼열)가 1893년 6월 곤당골교회를 개척하면서 그 안에 학당을 세우고 무료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박성춘은 두 딸도 엘러스선교사가 시작한 여학교에 보내서 공부를 하도록 했다.


 한편 1894년엔 동학운동이 일어났고 7월에는 청‧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여기저기서 전쟁에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 시체가 쌓여가고 이로 인해 곳곳에서 콜레라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때 박성춘도 전염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 이때 곤당골교회 사무엘 무어 목사와 제중원 담당의사 에비슨 선교사가 백정마을을 찾아가 전염병을 치료하였다. 두 사람은 전염병에 걸린 박성춘이 완쾌될 때까지 계속 왕진하면서 정성껏 치료를 해 주었다. 고종황제의 주치의가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백정에게 손을 대어 치료한, 당시로서는 충격적이었던 사건은 일파만파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 이때 감동받은 박성춘과 가족들 모두는 곤당골교회에 출석하였고, 박성춘은 1895년 초에 무어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곤당골교회에서는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당시 곤당골교회 교인은 20여 명 정도였는데, 고종의 주치의인 에비슨이 병을 치료해 주며 전도를 했기 때문에 정부 관리들이 많이 출석하는 양반 위주의 교회였다. 그런데 천민인 백정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 양반 교인들은 박성춘을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무어에게 압력을 가하며 교회 출석을 거부하였다. 무어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그들을 간곡하게 권면했지만 결국 양반들은 교회 출석을 거부하고 모두 나가서 따로 예배당을 세웠다.


천민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곤당골교회를 떠난 양반들이 나가서 세운 교회가 ‘홍문수골교회’였는데 순수 양반교회가 되었고, 곤당골교회는 백정과 상민들의 교회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을 겪은 박성춘은 자신과 같은 백정을 위해 애쓰는 무어 목사에게 크게 감동을 받고 온 힘을 다해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대접을 받는 길이 열렸으니 교회로 나오라고 천민들을 설득하며 전도하여, 곤당골교회는 다시 교인이 20여 명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반면 양반들이 세운 ‘홍문수골교회’는 생명력이 없는 교회로 전락하였다. 그러다 결국 분리한 지 3년 만인 1898년, 다시 두 교회가 합쳐져 ‘승동교회’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열정적으로 전도하면서 신뢰와 인정을 받던 박성춘은 마침내 1911년 승동교회 장로가 되었다.

 장로가 된 박성춘은 당시 내각총서로 있던 유길준에게 ‘백정차별금지법’을 만들어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장문의 탄원서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요구가 관철되어 박성춘은 조선 500년 동안 신분의 차이로 쓰지 못하던 '망건과 갓'을 제일 먼저 쓴 사람이 되었다. 그가 신분을 뛰어넘어 갓을 쓰던 날, 너무 기뻐서 잠잘 때도 갓을 벗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편 박성춘의 아들 박봉출은 1900년부터 1908년까지 세브란스의학교에서 박서양이란 이름으로 에비슨에게 의학을 배웠다. 그는 제1회 졸업생으로 1908년 조선인 최초 양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병원을 세우고 유일한 조선인 양의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민족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했으며, 3‧1운동 때에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참여 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서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마침내 박서양은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고, 2008년 광복절에 ‘대한민국건국포장’을 받았다.


 하나님은 천민인 백정 출신 박성춘과 그의 가족에게 무어 선교사를 붙여주시고 역사하셨다.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고 박성춘의 회심으로 말미암아 반상의 차별을 타파하였다.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을 들어 쓰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에 가슴 뭉클한 감사를 드린다.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137 (담임목사 박상훈)

 


- 글: 진흥홀리투어,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