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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16>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병촌교회66인, 순교기념탑

박경진 2016. 1. 5. 16:36

16. 신앙을 지키며 순교한 병촌교회66인, 순교기념탑

 

 

                           순교기념탑                                                      병촌교회                      

 

 

 

 충청남도 논산지역은 본래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배를타고 서해안을 답사하다가 선교후보지로 선정하고 선교하던 지역이다.

병촌리는 풍요로운 삶을 누리던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으며 병촌교회는 1935년 5월에 설립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핍밥속에서 계속 부흥 성장하고 있었으나 일본이 1943년 교단을 일본 기독교 조선교도연맹으로 강제 통합하면서 교회를 폐쇄 시키고 교역자와 교회대표들을 구속시키므로 큰 아픔을 겪었다. 이때 박해를 받고 흩어지면서 숨어들어간 성도들은 가정교회 형태로 신앙을 지키고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광복과 함께 정부가 수립되고 있었으나 예배당도 없이 신앙을 지켜오던 병촌교회는 우제학 집사, 노미종 권사, 김주옥 집사 등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면서 힘차게 부흥의 역사를 세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재건과 부흥의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일어난 김일성의 불법남침으로 평화로운 강산이 초토화되는 불행이 닥쳤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공산당의 군홧발에 교회가 짓밟히면서 이 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전국 각처에서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는 참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 해방 후 남로당 좌익 세력이 강성하던 논산 지역 성동면 일대에서는 우익 진영과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행위와 박해가 시작 되었다.

공산당은 기독교인들만 보면 기제국주의 앞잡이 반동분자로 규정하고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그래서 우제학, 김주옥 집사를 잡아 가두고, 기독교신앙을 버리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고 고문했다.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고,결국 논산의 상급기관으로 호송되어 더욱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병촌리 일대에서 공산당에 맞서 신앙을 지키다가 처참히 죽어간 병촌교회 순교자들을 보면 남자가 27명(신약),여자가 39(구약)이다. 모두 66명(성경66권)이 신앙을 지키다. 순교를 당했는데 이는 성경적으로도 큰 의미를 느끼게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공산당은 병촌교회 성도들이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도록 겁박하며 잔혹하게 고문하고 강경한 회유책을 썼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맞섰다. 무자비하게 살생을 벌이던 최후의 순간에 극적으로 미군 비행기가 폭격하는 틈을 타서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주옥 집사가 다행히 산 증인이 되어 지금까지 그들의 만행을 낱낱이 고발하며 증언하고 있다.

 병촌교회 66명 순교자의 생명을 앗아간 상황을 돌아보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불법 남침으로 물 밀 듯이 밀어닥친 공산군들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갔고, 지방 적색분자들과 합세하여 각처에서 양민 학살을 일삼았다. 하치만 마침내 유엔군의 9.28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서울이 탈환되었고, 마침내 전국적으로 구군이 우세하게 되었다. 반면에 힘을 잃은 공산군은 퇴각하면서 최후 발악으로 병촌교회 교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몽둥이와 삽, 괭이, 죽창 등 갖가지 농기구들까지 동원하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성도들을 뒷산 계곡의 구덩이에 한꺼번에 파묻었다. 당시 우제학 집사의 부인 정수일 집사(당시 31세)는 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과 함께 둘러앉아 기도하고 찬송하며, 오히려 공산군들에게 "공산군은 패전하니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 바으라."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자의 거룩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사실은 공산당에게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타출한 김주옥 집사와, 붙잡히기 직전 어린 동생을 업고 도망친 김주옥 집사의 딸 김명호(당시 15세)의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명호 사모는 "공산군은 한옥 대청집인 우리 집을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으며, 아버지를 비롯해 교회에 다니는 남자들을 잡아다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다행히 미군기가 폭격할 때 도망쳤지만 작은아버지는 마을에서 다시 붙잡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산당은 어머니를 잡아다가 대청에 묶은 채로 높이 올렸다 바닥으로 내리치면서 '천당에 가는 기분이 어떠냐?' 이렇게 조롱까지 했습니다. 살상이 끝난 후 나중에 남은 사람들이 시신을 찾아 나섰는데, 온 몸에 피멍과 상처가 가득한 시신들, 눈과 팔이 빠진 시신 등이 이산 저산 구덩이에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차마 끔찍해 두 눈으로 볼 수 가 없었습니다."라고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진술 하였다 .

 병촌리  집단순교사건은 성결교단 내에서는 6.25 당시 단일교회 순교사건으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면류관'모양의 순교기념교회 앞에는 기도하는 모습을 형상화한'66인 순교기념탑'(성결교회 순교사적 제1호)이 서 있는데, 그 4개의 탑 날개는 성결교회의 4중복음을 상징하며 탑의 받침대에는 66명의 순교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 순교기념교회와 순교기념탑은 순교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인근 마을에 위치하고 있지만 순교자들이 처참하게 순교당해 뭍혔던 마을 뒷산과 골짜기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어, 열아홉  가정 66명의 평신도 순교자가 보여준 존귀한 순교신앙과 정신을 생생히 느끼게 하고 있다.

 

 병촌교회는 매년 9월 마지막 주일을 '순교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을 지키면서 목숨 바쳐 희생한 66명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되새기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 사진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아쉽지만, 이 순교의 진실은 한편의 드라마로 후세들에게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을 만한 역사의 한 페이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소 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228 (병촌교회 담임목사 : 임용한)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