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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13>평신도순교자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이야기

박경진 2016. 1. 5. 16:30

13.평신도순교자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이야기

 

                                   ▲ 최인규 권사                                               ▲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 천곡교회         

 

                                    

평신도순교자 최인규(1881)는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1881년 삼척군 송정리(현 동해시 송정동)의 부유한 양반가 최돈일 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서당에서 한문수학을 하는 등 앞서가는 청년으로 성장하여 18세 되던 해 홍은선과 결혼을 하였다.

 평범한 삶을 살던 그가 1919년 동해지역에서 3.1운동을 주도했던 같은 마을 출신 김원대에게서 민족주의 정신을 배우게 되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한편 1921년 그의 나이 40세에 북평감리교회(현 북평제일교회) 김기정 목사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 그 후 그는 구원의 확신과 불같은 신앙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 후 금주,금연은 물론 섬기던 우상과 각종 제기(祭器)들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 1932년 권사로 임명되면서 당시 기도처에 불과했던 천곡교회를 짓기위해 애쓰던 권화선 속장을 도와 교회를 세우는 일에 앞장섰으며, 천곡교회인도자로 설교도 하게 된다. 그는 성령체험과 치유은사를 받고 개인전도와 교회봉사에 더욱 힘썼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수정 선생(1887~1977,동해교회 장로)을 통해 구약성서 공부를 하다가 이스라엘민족사와 우리나라 민족사가 비슷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천곡교회 인도자로, 주일학교 교장으로 봉사를 하던 중 1935년 자신이 소유한 논밭(논600여 평, 밭 1400여 평) 전부를 천곡교회에 헌납했다. 그는 또한 교회 강대상을 제작하였는데 밑면에서 5계단을 올리고 위 상판에서 5계단을 내려 중앙에는 사각으로 촛대를 상장하고 거룩한 제단을 상징하는 듯이 설꼐하여 3개를 제작했다. 그것을 옥계교회,북평교회에 하나씩 보내주었고 하나는 천곡교회에서 강대상으로 설교하며 사용하였다.

 

 최인규 권사가 예배인도하면서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다. 다른 신은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십계명에는 하나님 외에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고 신사참배 반대의 설교를 하였다. 이런 그를 일본 경찰은 가만 두지 않았다. 마침내 1940년 5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천황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수감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문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가혹한 고문속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신앙의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감옥에서도 열심히 예수를 증거했다.

 한번은 일제 경찰이 최인규 권사를 망신주어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를 삼고자 똥통을 등에 지고 동네를 돌며 "내가 신사참배 거역한 최인규요. 내가 예수 믿는 최인규 권사요:라고 외치며 다니라고 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주의 이름을 박해를 바든 것이 감격하여 '나 같은 죄인을 주의 고난에 동참케 하심에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더욱 힘있게 외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마을 사람들은 그를 신념이 강한 신자로 여겨 추앙하게 되었다. 경찰이 이 일로 더욱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한편 예수 믿는 친국 차국성이 면회하여 최인규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것을 보고 경찰서장을 찾아 갔다. 차국성은 그를 위해 "최인규는 워너래 정신병 환자인데 예수 믿고 나은 사람이요. 아마도 그 정신병이 재발한 것 같습니다. 제가 친구를 잘 타이를 테니 석방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당신이 정신병자요. 예수를 믿으려거든 최인규처럼 믿으시오." 라고 했다. 또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천황을 비난하는 설교를 했다는 죄목으로 함께 투옥됐던 이진구 목사(고성교회)도 연로한 최인규권사를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며 말했다.

"최권사님! 앞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나가세요. 그러다 여기서 그냥 죽습니다." 그러자 최인규 권사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벌컥 내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살아서 무엇하게요?"라고 말했다. 이 대 이진구 목사는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목사로서 신앙양심을 못 지킨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인규 권사는 감옥에서 늘 찬송을 부르며 전도했고 온갖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굳은 신앙의 걸제를 지켰다.

 

<천곡교회 최인규 권사 순교 기념비>

 

 

 결국 그는 옥고를 견디지 못하며 고문 후유증으로 1942년 12월 16일 대전형무소에서 6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옥중에서 순교자의 서국한 반열에 들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해서 공동묘지에 묻혔었는데 해방 후 1946년 3워러 삼척지역의 교회들이 힘을 모아 성내리 삼척읍교회(현 삼척제일교회)에 그의 기념비를 세울 때에 몰래 비석 밑에 묻었다. 당시 유해가 천곡교회로 가지 못한 것은 1943년 일경이 그 교회를 철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유해는 1986년에야 비로소 재건된 천곡교회로 옮겨지고 순교기념비가 다시 세워졌다. 현재 천곡교회는 '최인규 권사 기념예배당'으로 되었으며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곳에 있다. 그의 생가는 송정동 741번지에 있었으며 천곡교회에는 최인규 권사가 생전에 제낙하여 사용했던 강대상이 그의 유품으로 보존되고 있다.

 

 최인규 권사는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와 기독교 타압에 맞서 항거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평신도이고 또한 후손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단12:3)는 말씀처럼 그의 거룩한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믿음의 후손들에게 꺼지지 않는 영워너한 빛이 되리라.

 

주소 : 강원도 동해시 천곡동 1081-8 담임목사 고문석 목사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