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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11>야월교회 전교인 65명 순교자들의 흔적

박경진 2016. 1. 5. 16:24

11.야월교회 전교인 65명 순교자들의 흔적

 

   <순교자탑>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8년 4월 5일이었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전북지방을 여행하다가 야월리에 배를 대고 평화롭고 조용한 야월리 마을을 둘러보던 중 갯마을 사람들의 호의에 끌려 복음을 전하면서 야월교회를 세웠다.

 

 야월교회 전교인 65명은 한꺼번에 순교를 당했다. 평화롭던 야월리에 밀어닥친 불행의 소용돌이는 1950년 6월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은 한국전쟁 발발 3일 전이었다. 평화롭던 야월리에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서해상을 통해 북한인민군 1개 부대가 야음을 틈타 기어들어오는 것을 목격한 마을주민들은 염산면 지서에 신고를 한다.

마침 광주에 여순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군 병력이 내려와서 치열한 교전 끝에 거의 전멸시켰으나 부상당한 일부가 옥실리와 야월리 뒷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 후 애월교회 정일성집사의 동생 정문성 씨가 나무하러 갔다가 부상당해 숨어있던 인민군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즉시 경찰이 출동하여 포위하였지만 마을주민 정문성 씨가 가까이 접근하여 권유하고 설득해서 그를 자수하게 한다. 그런데 경찰은 그를 사여 집 옆으로 끌고가 총살해 버렸다.

이 사건 이후 다른 잔당들은 동료가 총살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하게하게 되고, 특히 이 일이 야월교회 교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믿는 이들에 대해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6.25전쟁은 발발 후 공산 세력이 한반도를 장악하는 듯했으나 인천상률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뒤바뀌어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마침내 국군들은 중앙청에 태극기를 휘날이었다.

 한편 1950년 9월29일 국군과 유엔군이 목포에서 함평과 영광으로 진입해 들어오는데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대적인 환영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미처 후퇴하지 못한 공산군들은 밤이면 산에서 몰려 내려와 국군환영대회에 나가서 만세를 부른 교인들과 동네 사람들을 잡아다 몽둥이로 매질을 하며 보복사                                              

살을 일삼았는데 이것이 여러 날 계속 되었다.

 그러던 중 교회당 뜰에서 양조장집 주인과 다른 유지들을 잡아다가 무릎을 꿇리고 마을사람들 앞에서 공개처형을 위한 인민재판까지 벌어졌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인민의 피와 땀을 착취한 악질 반동입니다. 이 악질들을 어떻게 죽이면 좋겠소?" 하면서 이들은 "인민의 원수니 쳐 죽여야 합니다."라고 목척을 높입니다.

그런데 이 때 야월교회 김성종 영수가 나서서 "아닙니다! 그 양조장집 어른은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쌀을 풀어 나눠주었고, 법이 없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나라에선 이런분에게 상을 주어도 모자랄진대 어찌 이렇 수가 있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됩니다."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이 때 "옳소!"하면서 갑자기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자 인민재판이 자신들의 계획대로 이루워지지 않음을 본 공산당들은 기독교인들을 먼저 죽여야 된다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그렇게 1950년 9월과10월 사이 야월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군에 의해 희생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야월교회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공산당은 교인들을 야월교회당에 모아놓고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등 온갖 포악한 짓을 다했다. 그러나 김성종 영수, 조양현 영수, 최판원, 최판섭 등은 눈앞에 다가오는 그 끔찍한 죽음 앞에서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주여! 주여!' 찬송을 부르면서 골고다로 향하시던 주님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리며 믿음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로마병정들보다 더 잔악한 공산당들은 성도들을 두들겨 패면서 설도 수문 앞까지 끌고 가서 바닷물에 수장 시켰다. 짐승만도 못한 공산당은 가족 갓난아이들까지 손발을 뒤로 묶은 채 바다에 빠뜨려 수장을 시켜 버렸다. 이렇게 야워러교회는 어린이를 포함한 65명 전교인이 모두 죽임을 당해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 같은 눈물겨운 순교사실에 대하여 손을 대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야월교회는 이런 사실을 모르는 채 자라는 어린이들로부터 다시 시작되었고 배길량 목사가 나서서 이들의 순교사실을 알리고 이들을 기리는 복원사업을 1989년 시작하여 순교자기념비를 세우게 된다. 이렇게 야월교회 순교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전국교회가 모금운동을 벌이게 되었고 마침내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광주노회에서 공산군에 의해 희생당한 야월교회 전교인 65명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리기 위한 순교자기념탑건립을 마치고 1990년 11월29일 준공예배와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전라남도에서 세워진 특별예산과 영광군의 특별지원으로 2006년 6월에는 야월교회 예배당과 순교자기념탑 옆의 대지에 연건평 2백50평 규모로 "기독교인순교기념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기념관은 야월교회 순교자뿐 아니라 영광군 내에서 순교한 이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1층에는 기독교인 순교사실을 정리한 전시실이 있으며 1층 중앙에서 2층까지 높이로 치솟아 세워진 거대한 기도의 손 조각 작품은 웅장하고도 수련함으로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2층에는 예배실과 순교자들의 흔적을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사진으로 혹은 그림으로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다. 이곳을 둘러보는 순례자들은 6.25 한국전쟁 당시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을 바쳐 흘린 '순교의 피'가 한국교회의 부흥성장은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세계 속에 우뚝 서게 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진한 감동을 받는다.

 

 

 

- 심금을 울리는 고 훈 목사의 時 -

'당신들이 뿌린 순교 피' 우리는 살아서 말하고 당신들은 순교로 말합니다.

 우리는 입으로 고백하고 당신들은 목숨을 바쳐 고백합니다.

 우리는 숨 쉬며 살고 당신들은 숨 막혀 순교자로 여기 살아있습니다.

 

 

 

소재지 :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리 471-1(야월교회 배길량 목사)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