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10>대한민국의 여성 1호박사 우월(又月)김활란
10. 대한민국의 여성 1호박사 우월(又月)김활란
▲ 김활란 박사 (1899-1970)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동상
김활란(金活蘭1899.-1970.)은 인천 배다리마을에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기득'(己得)이었는데, 내리교회 전도부인 헬렌에게 전도를 받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7세 때 헬렌(Hellen)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가 다시 한자식 ‘활란’으로 개명하였다. 8세 때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영화소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1907년 9세 때 김활란은 이화학당으로 전학하였고 고등과를 거쳐 대학과에 입학, 1918년 졸업식에서 졸업논문을 우리말과 영어로 발표하여 이목을 끌었다. 졸업 후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후진을 양육하는 데 헌신하게 되었다.
그의 이화학당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난다. 당시 그는 지하 독립운동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일로 1년 남짓 도피생활을 하였다. 이후 이화학당 교사직을 맡으며, 1920년에는 자신을 포함한 이화학당 학생(홍애시덕, 김합라, 윤성덕, 김보린, 김애은, 김신도)으로 구성된 7인 전도대를 결성하였다. 1920년 6월 21일, 전국 전도여행에 앞서 YMCA 강당에서 전도비용모금을 위한 구령회를 열었는데 청중이 이들의 열심에 감화되어 많은 의연금을 내 주었다. 전도대는 6월 23일부터 약 1개월 동안 평양, 신의주, 안주, 곽산, 정주, 북진, 양시, 차령관, 강서 등 북부지역을 돌면서 낮에는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지를 돌리고 밤에는 강연회를 열었는데 대단한 반응을 일으켰다. 이후 김활란은 1922년 북경에서 열린 기독학생연합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며 처음으로 해외를 접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김필례, 유각경 등과 함께 한국 YWCA를 창립하고 7월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1924년 6월 오하이오 웨슬레안대학 문학학사 학위를 받고 보스턴 대학교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여 1년 만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를 준비할 즈음 이화학당의 아펜젤러 교장으로부터 모교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자 그녀는 학업을 중단하고 1925년 6월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영어와 종교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1930년 그는 중단했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도미,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1931년에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교육"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니, 한국최초의 여성 1호박사가 되었다. 그는 특별히 여성들에게 큰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바쁜 중에도 주일예배를 꼭 지키며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1930년, 씰난섬의 여자기독교 동남아시아대회에, 1932년, 미국 애틀란타의 북미감리교대회에 참석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한편 이화학당은 1936년부터 일제의 기독학교 탄압과 신사참배 강요로 큰 시련을 겪는다. 특히 외국선교사들을 스파이로 몰며 감시하고 공공기관 운영을 금지시키자, 아펜젤러는 김활란 박사에게 교장직을 물려주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1939년 그의 나이 40세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제7대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책임을 맡은 그는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열의를 다해 학교를 위해 일했다. 1940년 외국인들에게 본국 추방령이 내려지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다른 기독교학교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상황 속에서도 김활란 박사는 기도로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은 죄 없는 우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정책과 함께 그에게 강연을 하도록 강압적인 요구를 했다. 극심한 일제의 간섭과 억압 속에서 오직 학교를 지켜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만 앞뒤를 잴 여유도 없이 이를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고 만다. '창씨개명', '한국어 말살', '일본어 강제사용' 등의 요구 앞에서 당시 여성교육을 관철시키겠다. 는 것이 그녀의 의지와 결단이었으나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친일 행적이라는 굴레를 벗어 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 그어진 이 아픈 상처의 흔적은 끝내 지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다만 그의 행적의 모든 공과를 후세들에게 평가하고 교훈을 삼도록 역사적인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지도자들은 나라를 재건하는데 매진했다. 김활란 박사도 그해 12월 대한촉성 부인회를 조직하여 독립정부수립에 크게 기여하는 한편, 이화전문학교를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등 3개 단과대학을 나누어 설립하고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마침내 1945년 10월 1일 신촌 이화학교 정문에는 "이화여자대학교"라는 새 간판이 걸리게 되었다. 당시는 아직 정식허가를 못 받은 상태였지만 종합대학으로서의 첫 학기는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녀는 1946년에는 항주에서 열린 여자기독교청년회 세계대회에 참석, 1949년 3월 보스톤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취득, 9월에는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합(UN)총회에 참석하는 등 다방면에서 국위를 선양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재단이사장으로 YWCA사업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물론 1950년에는 대한공보처장관에 임명되었고, 대한민국여학사협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는 등 대내외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6.25전쟁 중에는 1951년『국민홍보외교동맹위원장』을 역임했고 5월에는 모교인 웨슬리언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는가 하면 9월 1일에는 피난지인 부산에서 이화여자대학교의문 을 다시 열기도 했다.
또 1953년에는 영국정부 초청으로 런던에서 열린 언론인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했고,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4년 미국국제기독교선교위원회에 참석, 6월에는 코넬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3년 8월 정부에서 "문화공로상", 그리고 아시아의 노벨상이라는 “막사이사이상”(공익부문)을 필리핀에서 수상하였다. 동년 10월에는 세계 저명인사, 기독교 지도자에게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동양인 최초로 미국에서 수상했다.
이렇게 한 여성이 감당하기에는 심히 무리한 활동으로 그녀는 연이어 병환이 겹쳤다. "나는 인간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날마다 최선을 다했으며, 더 좋은 생명의 길을 찾기 위해 육체와 환경의 얽매임을 극복하면서 내 나름대로 승리의 길을 걸어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2월10일 71세의 일기로 제자들과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활란 박사의 장례식은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평소 "장례식 대신 더 풍성한 생명의 길로 가는 환송예배를 드려주기 바란다. 거기에 적합하도록 승리와 웅장하고 신나는 음악회가 되기를 원한다." 고 하던 고인의 부탁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 대강당에서 '개선행진곡'과 '할렐루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금란동산에 자신의 몸을 뉘었다. 정부는 그의 영전에 대한민국외교공로상 최고훈장을 추서했다. 그는 평소 사람이 '태어날 때 위대하게 태어나는 사람', '자기의 노력으로 위대해지는 사람', '환경이 위대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은 그 세 번째라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은 곧 우리들에게 어느 쪽에 속한 사람인지를 가려보라는 도전을 던져주고 있다. (윤춘병감독 저서에서)
-글 :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