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96. 강화 교동교회

박경진 2011. 7. 25. 13:34

강화 교동교회
2011년 06월 22일 (수) 14:05:46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강화교동교회의 종탑

연산군의 유배지로 잘 알려져 있는 교동도는 기독교 유적지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교동도는 서울에서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도를 가로질러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하여 다시 배편을 이용해서 들어가야 하는 ‘섬 안의 섬’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북한의 해주에서 교동도를 거쳐 강화도와 인천으로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교회가 일찍 세워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창후리 선착장에 내리면 1990년에 새로 지은 교동교회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교동교회에서 오른편으로 나 있는 길에 접어들면 상룡리 옛 교동교회를 만날 수 있다.

교동도에 처음 복음이 들어오고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99년이다. 강화도에 두 번째로 세워진 홍의교회의 최초 교인이던 권신일은 교동도와 서해의 섬 일대에 선교 개척자로 자원해 들어갔다. 이런 결단을 내리면서 권신일은 아내에게 “우리가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굶어 죽지 않을 것이니 교동에 교회를 개척하러 갑시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권신일의 조카 권혜일도 강화에 인접한 섬을 돌며 복음을 전했고 그를 도와 교동도에 교동읍교회를 세워 기초를 마련했다. 처음 사랑방 형태의 교회공동체에서 1900년에 인천 강화연안 교인들이 모금한 돈으로 읍내리에 초가 한 채를 구입하여 사택 겸 집회 장소로 사용하였다.
또한 권신일 부부는 섬 전체를 돌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러나 교동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로 잘 알려진 향교가 있는 유교 세력이 강한 지역이어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더욱이 향교에서 제사 지낼 때에도 전도를 하는 권신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적 선비들은 군수에게 찾아가 그를 추방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군수는 "임금님이 계신 궁궐(덕수궁) 바로 옆에도 예배당(정동제일교회)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보면 임금님께서도 교회를 반대하시지 않았다는 게 아니냐?"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군수가 교회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동안 양반 눈치를 보며 교회 나오기를 주저했던 주민들이 하나 둘 용기를 내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권신일의 활발한 선교활동으로 2년 만에 10가정이 교회에 등록했고, 1907년에는 교동지역 교인만 1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 강화교동교회

1933년에는 권신일의 영향을 받은 이들 중 상용리의 박성대와 박형남 부자가 땅을 기증하여 건축된 상용리의 새 예배당으로 옮겼다. 한편 이들 박씨 집안의 박기만은 교동교회에 밭을 기증하였고, 또한 그의 아들은 일제시대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맹인교육에 헌신하여 ‘맹인의 세종대왕’이라 칭송받는 송암 박두성이다. 교동교회는 해방 후 난정교회(1949)와 교동중앙교회(1952)를 분립시키며 성장을 거듭하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교동에 설립된 12개 교회의 '모교회'로서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1979년 교인들이 분열되어 일부가 대룡리에 교동제일교회를 설립하면서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1990년부터 통합을 결의하며 화합의 장을 모색하고 있다.

현재 교동도에 있는 기독교유적은 1933년 지어진 옛 교동교회가 유일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담임교역자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으나,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지금은 기도처로, 그리고 옛 교동교회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곳으로 관리되고 있다. 예배당은 처음의 초가지붕을 1970년대에 푸른색 양철지붕으로 바꾼 것 외에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예배당 앞에 서 있는 종탑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종탑의 종과 관련하여 일제시대 때 전쟁에 군수물자로 쓰려고 배에 싣고 가던 중 큰 파도를 만나 도로 제자리에 걸어놓았다고 하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한편 1991년 교동교회 박용호 권사가 양어장을 만들 계획으로 옛 교동교회 예배당 맞은편에 시추했는데 이곳에서 뜨거운 온천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온천수가 칼슘성분이 많아 아토피를 비롯, 신경통, 관절염에 효력이 있어 온천장으로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베데스다 온천이라고 했으나 물맛이 짜고 써서 1994년부터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라의 쓴물’(출15:23)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마라 쓴물 온천장‘이라 명명했다. 2000년 강화본도의 창후리로 옮겨 현대적 시설로 개장하였으며 교동도에 있는 원래의 ‘마라 쓴물 온천장’에서 물을 길어 강화본도로 나르고 있다.

교동도는 작은 섬이지만 일찍 복음이 들어와 축복의 땅이 된 곳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전도열정을 오늘의 한국교회가 본받아 다시금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