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인터뷰

[주간기독교 커버스토리 2007.11.16]

박경진 2009. 7. 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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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진 것 없었으니,
잃을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진흥문화 박경진 회장
배명희 (기사입력: 2007/11/16 15:19)

(주)진흥문화는 달력제작 사업을 시작으로 30년간 꾸준히 업계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기업이다. 박경진 회장은 맨 주먹으로 상경해 끼니를 거를 정도의 가난 속에서 (주)진흥문화를 일구어낸 장본인이다.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사업을 통해 배운 교훈과, 얻은 물질을 바탕으로 입양아 초청행사, 성지순례 사업 등 교회와 세상을 돕는 다양한 사업에 열의를 쏟고 있다. 특히 문화선교의 일환으로 운영을 지원하고 있는 진흥아트홀은 척박한 한국 기독미술계를 위한 보이지 않는 큰 힘이다. “(봉사할 일에 대한) 마음뿐이지 못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말하지만 지난 12일 한국기독교선교대상 평신도 부문에서 수상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렇듯 기업과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는 일보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 무엇보다 본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는 박경진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진흥문화는 성화 달력제작을 시작으로 번창하게 됐다. 사업을 시작한 계기는?
일반달력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교회는 많은데 교회달력은 왜 없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들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농사꾼이었던 내가 상경해서 노점 보따리 장사, 건축현장 막노동 등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일을 하던 중 발견한 길이다. 성화 그림을 복사해서 화가에게 가져다 주고 복제를 부탁했다.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지만 결과물이 좋았다. 처음부터 반응이 아주 좋으니 사업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 의욕적으로 뛰어들게 됐다. 처음에는 여직원 한 명과 함께 일을 하다가 사업이 번창했는데, 그럴수록 이 사업이 나의 사명으로 느껴졌다. 이 길만 30년을 걸었다. 지금은 100명 이상의 가족과 함께 이 일을 해오고 있다.

(주)진흥문화 사업내용을 소개해 달라.
달력 제작이 주요 사업이다. 성화 달력 제작으로 시작한 사업장에 점차 인원이 늘어서 시설도 늘리고 하다 보니 지금의 규모로 번창하게 됐다. 지금은 일반 달력도 제작한다. 성화 달력 300만 부와 함께 총 600만 부를 생산한다. 인쇄사업은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는 만큼 발전한다. 우리나라에도 문화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 인쇄물의 공급 양이 늘고, 질이 높아졌다. 인쇄문화가 발전해야 문화 수준이 높아지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인쇄물을 생산하고 있는데 교회에서 쓰는 거의 모든 인쇄물을 취급한다. 이 사업으로 교회의 문화 수준을 높이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업의 내용이 다양해지다 보니 사원 수가 늘고, 공간도 넓어지게 됐다. 신설동 본사에 70여 명, 성수동 인쇄, 제본 공장에 40~50명의 직원이 있다. 성수기 임시직까지 하면 그 수가 더 많다. 얼마 전부터 아들에게 사업장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나, 사업과 관련한 실무에서는 완전히 손을 뗐다. 대신 장로회 전국연합회 회장, 성지순례 선교회 사업 등 이런저런 교계 문화사업을 하고 있다.

인쇄사업이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IMF때는 괜찮았나?
힘든 시기였지만 돌이켜보니 경제적인 큰 시련 없이 무난하게 지나왔다. 감원한 직원한 사람 없이 지금까지 함께 달려왔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근검절약을 실천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한 소견서를 직원들에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인건비를 10% 줄이자’, ‘인건비 30%를 떼어서 어려울 때 회사의 운영자금으로 쓰고 회복된 다음에 돌려받자’는 등의 감동적인 제안도 있었다. 물론 그 제안이 실행된 것은 아니지만 그 뜻이 정말 고마워서 생각해보면 지금도 목이 멘다. 나 또한 IMF가 발표된 직후 자가용을 팔아 그 해 구정 때 직원들 떡값에 보태는 등 근검 절약하는 생활을 실천했다.

직원들의 결속이 강한 것 같다. 비결이 무엇일까?
사원들 중에는 20년 이상 장기 근속자가 많다. 우리 회사만의 특이한 점은 부부 사원, 형제 사원들이 많다는 점이다. 한 부서 혹은 타 부서에서 일하는 부부는 이미 여러 쌍이 배출됐고, 삼형제가 우리 회사에 다니는 경우도 있다. 다른 회사에서는 기피하는 점이지만 관계가 부드럽기 때문에 장점도 참 많다. 또 매일 아침 부서끼리 성경을 읽고, 찬양 부르고, 차를 함께 마시는 시간을 갖는다. 월요일은 신설동 3층 예배실, 성수동에서는 사무실에서 전 직원이 한 자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주보에 성경구절을 싣고 그것을 다함께 교독한다. 이런 식으로 30년 동안 꾸준히 성경을 읽으니, 지난 10월에는 전 직원이 신구약 통독을 하게 됐다. 그 기념으로 떡 과일을 차려놓고 작은 ‘책거리’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가 어느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주보에는 성경구절 외에도 사우들, 회사소식을 상세하게 싣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주보 자체가 회사의 역사가 되었다. 이 주보는 한 장 한 장 모아서 책으로 만들고 있다.

시장의 논리와 예수님의 가르침이 상충되어 고민했던 경험은?
예를 하나 들자면, 장부정리는 100퍼센트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 기독교적 양심인데 현실에서는 철저히 지키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아주 미미한 내용이었지만 세무사찰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이 있은 후에 장부정리를 완전히 처음부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불가피한 상황이라 변명할 수 있었지만 현행 조건상 잘못이라 지적을 받고 나니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갈등 속에서도 항상 감사할 조건을 찾는다. 일을 제대로 하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질을 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면에서 부족한 점은 여전히 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 정도 일구었으니까 손해를 본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감사할 일만 있을 뿐이다. 선교의 역사를 보면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던 신앙의 선배들이 있는데 거기에 비한다면 나는 분에 넘치는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랜드 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기업 윤리에 대해 말한다. 이에 대한 생각은?
나는 아무래도 경영자다 보니 솔직히 기업인에게 마음이 기운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 사람이 상식이 잘못되고 삐뚤어져서 의도적으로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태가 장기화 된 것도 기업주가 자신의 뜻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뜻을 더더욱 굽히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노사는 항상 대화를 나누고 서로 가깝게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도 직원들과 같이 밥을 먹고, 출퇴근 시간을 잘 지키고 있다. 함께 예배 드리고, 성경 읽는 시간을 갖는 것도 노사갈등을 막는 요인이라 본다. 우리 회사는 90년도 초에 노동부로부터 노사갈등이 없는 회사로 인증 받기도 했다. 우리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대신 사우회라고 하는 협의기구가 있다. 물론 나는 그저 좋게만 보는데 사원들 입장에서는 불만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웃음). 그래도 지금껏 한 번도 심각한 갈등을 겪은 적이 없다는 점이 내 생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1980, 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사업의 방향이 달라진 점이 있나?
정보화 시대가 되면서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첨단 생활용품들이 생겨나 편리한 기능이 많아졌다. 요즘엔 휴대폰에도 달력이 다 나오지 않나. 달력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 것이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전히 달력은 제 기능을 하고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질이 고급화 되고, 단순히 그림만 넣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기능과 장식적 기능을 함께 수행하는 것으로 바뀐 점 정도다. 달력의 기본 기능은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새 시대에 따라 생각을 바꾸고 노력해야 한다는 절박감은 많이 느끼고 있다.

해외입양아 초청사업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사업 내용을 소개해 달라.
오래 전 알고 지내던 목사님 한 분이 전화를 해서, 어떤 사람이 쓴 글로 출판을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요청한 적이 있었다. 저자를 만나 대화해보니 다문화가족 문제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책은 주로 동두천, 의정부 일대의 외국 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생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적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95년도에 이 책의 출판을 도왔는데 그 책을 내면서 자연히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국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을 아이들이 많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6년 우연한 계기로 해외입양아 국내 초청행사를 처음 시작하게 됐다.
스스로 찾아서 한 일이었기 때문에 더 보람이 컸고, 꾸준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들이 자신에게도 대한민국의 피가 가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서 좌절감에 빠지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살길 바랐다. 해외 입양아들에게 대한민국의 뿌리를 일깨우기 위해 전통문화재를 보여주고, 체험하게 했고, 낳아준 어머니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기 위해 산업체 방문을 시키기도 한다. 18세 이상 28세까지 남녀 20여 명이 참가했던 첫 행사 때 소감발표시간을 잊지 못한다. 모인 자리가 눈물 바다가 될 정도로 감동이 넘쳤다. 해외입양아들이 자신이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긍정하면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부심과 꿈을 안게 되었다는 증언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맺힌다.
사업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와 자녀 교육문제까지 해결하게 됐다. 이제는 거기서 더 나아가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입양아 초청사업도 그 일환이다. 가난한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다. 두 주먹만 쥐고 서울에 올라와서 아침을 굶고 일터에 나간 적도 많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누고, 베풀고, 참여하는 일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사명이고, 내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래도 마음만 간절할 뿐이지 못하고 있는 일들이 정말 많다. 감사함을 느끼면서 살지만 삶으로 다 실천하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