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민족운동가, 청년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
민족운동가, 청년운동가였던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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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김옥균 등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 윤치호, 안종수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의 신흥문물과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큰 충격을 받은 그는 개화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1884년 12월 일어난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가 1887년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갈 때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이후 1888년 10월 귀국하여 1892년에 전환국 위원, 1894년에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관, 학부아문 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1896년에는 내각총서와 중추원 1등 의관이 되었고, 다시 관제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랐으며, 동년 7월에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간부를 역임하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의장과 사회를 도맡았다. 1898년 11월 종로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여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려 동지들과 경무청에 구금되었다가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1898년 12월 정부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벼슬을 다 내려놓고 초야에 묻혀 지내다가 1902년 수구파들이 조작한 개혁당 사건으로 투옥되었는데, 감옥에서 우연히 '약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 뺨을 돌려대며....또 네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마태복음 5장말씀과 산상수훈을 접하고는 성경과 기독교 관련서적을 통독한 후 54세의 나이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독립협회도 무산되고, 정부도 친일파 인사들로 채워진 상황에서 나라의 운명을 구할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신앙을 통한 부국강병책을 찾고자 했다. 1904년 2월 석방된 이상재는 서양선교사 게일이 담임목사로 있던 연동교회에 옥중동지들과 집단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후 1905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에 가입, 초대 교육부 위원장이 되어 민중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08년에는 기독교청년회의 종교부 총무를 맡아 성서연구반을 만들어 신앙운동을 주도했으며, 1909년에는 구국운동에 앞장서며 ‘백만인 구령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0년 국권침탈과 일제의 무단통치 상황이 되자 노동야학을 개설하여 청소년들을 교육하였으며, 1913년에는 63세의 나이로 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여 1926년 명예총무로 물러날 때까지 청년회의 재정 확립, 지방으로의 확장을 이루었다. 1914년에 학생YMCA를 망라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민중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날카롭고 의미심장한 풍자와 해학을 구사하며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집회, 출판, 언론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상황에서도 YMCA는 해산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이후 1919년 3.1운동의 발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상재 선생의 탁월한 리더십이 바탕이 되었다. 한편 그는 3.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했다는 죄목으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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