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87. 의사로 한 길 걸은 순례자- 야성(野聲) 문창모 장로

박경진 2011. 3. 30. 10:59

 

의사로 한 길 걸은 순례자- 야성(野聲) 문창모 장로
2011년 03월 23일 (수) 14:44:56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문창모 박사(1907.4/23~2002.3/13)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한 문창모(文昌模, 1907.4.23~2002.3.13)는 유복한 가정에서 대학공부를 한 부친의 영향으로 삼봉공립보통학교-영성학교-정주 오산학교-배재고보에서 일찍부터 신식교육을 받았다. 영성학교 재학 중, 교장선생님이 "너는 집도 잘살고 똑똑하니까 예수만 잘 믿으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한 말에 주일학교에 나가면서 처음 기독교에 접했다.
배재학당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만세사건에 참여했다가 3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당시, 이질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한다. 이후 1932년 셔우드 홀 선교사가 설립한 해주 구세병원에 취직했는데, 당시 서무과장으로 있던 정재용의 권유로 해주 남본정교회에 출석하여 함께 장로가 되었다. 이후 1933년 평양기독병원 이비인후과를 거쳐 1937년 해주에서 첫 개인병원 '안이비인후과 전문 평화의원'을 열었다. 1938년에는 감리교 총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감리교회의 일본교회 예속 반대투쟁을 벌였으며, 1942년에는 조선기독교감리회연맹 해주대표로 총회에 참석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일 종교투쟁을 펼쳤다.
1948년 8월15일 정부가 수립되자, 그 해 10월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부상병이 모여들자 그는 피난가지 않고 남아서 환자를 치료하였다. 1·4후퇴 때는 청도에서 환자를 돌보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여 한 달 만에 살려냈는데, 10년이 지나서 원주 어느 교회에서 간증 설교를 하다가 그 환자를 다시 만난 일화도 있다.

한편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있던 1953년 대한결핵협회를 조직하고 기금마련을 위해 크리스마스 씰을 제작했다. 본래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캐나다 감리교선교사였던 셔우드 홀 박사에 의해 1932년에 선보였는데, 홀 박사가 일제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우리나라에서 쫓겨나면서 씰 발행이 중지되었다. 일제의 방해와 6·25 전쟁 등으로 중단된 크리스마스 씰을 문창모 박사가 10여 년 만에 다시 만들어 우리나라의 결핵퇴치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창모 장로는 1957년 미 감리교선교회와 캐나다 선교부가 40만 달러라는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여 건립한 원주기독병원의 초대원장으로 선임되어 원주로 내려간다. 이후 1964년 원주시 학성동에 '문 이비인후과'를 열고 43년간 진료한다. 환자를 우선시했던 그는,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등교하느라 진료 시간이 여의치 않은 이들을 위해 아침 6시에 병원문을 열었다. 이른 시간이라 간호사가 없을 때는 손수 진찰하고 약을 조제했다. 환자가 돈이 없으면 무료로 진찰해 주었으며, 간혹 딱한 환자들에게는 여비까지 주면서 보내기도 했다. 또한, 매주 토요일 오후엔 가난한 농가를 방문, 순회 진료를 하기도 하였다.
2000년 의약분업으로 병원과 약국이 폐업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는, “환자를 떠난 의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니다. 죽을 생명을 살려놓는 사람이 의사인데 생명을 취급하는 사람이 환자를 버려두고 싸움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명분이 좋아도 옳지 못하다."라며 신앙인으로서의 양심선언을 하고, 매일 새벽기도 후 곧장 병원 문을 열고 환자들을 진료했다. 그의 병원에는 비록 최신식 의료기기가 없어도 수십 년 된 단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 문 이비인후과의원


의사면허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다른 외적인 상황들은 자신이 환자를 보는데 아무런 이유가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의 인연으로 1992년 국민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하여 제14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때, 그의 나이가 86세로 최고령 국회의원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는데, 그 때에도 원주에서 새벽 진료를 한 후 서울로 올라가 의정활동을 하고 다시 원주로 돌아와 환자를 봐야 직성이 풀렸다. 이렇듯 죽는 날까지 환자를 보는 것이 소원이던 ‘한국의 슈바이처’ 문창모 장로는, 점점 다리와 손에 마비증세가 와 의료기를 쥘 수 없게 되자 2001년 3월 31일 의사로서의 70여년의 긴 여정을 뒤로 하고 은퇴하면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후 원주제일교회를 섬기며 건강하게 살다가 2002년 96세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인천도립병원장(1946), 국립 마산결핵요양소장(1947), 세브란스병원장(1949), 원주기독병원장(1957), 해주시 초대시장(1945),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1953), 국제대학학장(1957), 14대 국회의원(1992)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많은 일들을 맡아오면서도 하루도 환자 보는 일을 거르지 않았던 문창모 장로는 의사가 자신의 천직이며, 그 천직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굳게 믿은 철저한 기독교인이었다.

정부는 그에게 국민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문창모 장로는 자서전에서, 천리마 꼬리에 붙은 쉬파리가 힘들이지 않고 천리를 날 수 있는 것처럼 자신도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자신의 소명을 잘 알고 일생동안 실천한 문창모 장로의 삶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