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86. 항일운동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 손정도 목사

박경진 2011. 3. 16. 13:20

항일운동으로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 손정도 목사
2011년 03월 09일 (수) 13:56:25 박경진 장로 kj4063@hanmail.net
 

 

 
▲ 손정도 목사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 1872~1931) 목사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홍리에서 태어났다. 평범한 유교 선비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3세에 세 살 연상의 박신일과 결혼하였다. 23세 때 관리등용시험을 보러 평양에 가던 중 우연히 하룻밤 묵게 된 목사집에서 기독교 교리를 접하고는 개종을 결심한다. 그 길로 집에 돌아간 손정도는 상투를 자르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부셨다. 이 때문에 미친 자식 취급을 받고 집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간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존 무어)의 목사관에서 일하면서, 1901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거기서 김형직(김일성 아버지)과 한 반에 편성되면서 인연을 맺는다. 선교사들로부터 미국과 서양에 대한 학문을 함께 배우며, 가족까지 서로 만날 정도로 친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이후 손정도는 1909년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평양 남산현교회와 진남포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기독교 진리를 삶으로 실천하고 전파하는 것을 '민족 해방'의 길로 생각한 그는 일제로부터 자주독립하여 실의와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명으로 도산 안창호와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대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는 등, 민족 운동가들과 연대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1년 6월 목사 안수를 받고 하얼빈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중국인과 한국인 교포를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12년 가쓰라 일본수상 암살모의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겪는다. 이후 일제는 '북간도에 독립무장학교를 세우기 위해 황해도의 금광을 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그를 다시 체포하고 전남 진도로 유배를 보낸다. 1913년 11월 풀려난 후 다시 중국행을 시도했으나 일제의 방해와 감시로 길이 막히자, 서울 동대문교회와 정동교회에서 시무한다. 그리고 중단했던 신학공부를 재개하여 191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를 졸업(5회)하였다. 그러다 1918년 7월, 표면상 '치료'를 이유로 돌연 정동교회를 사임하고 독립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간다. 그리고 1919년 2월 중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아예 망명하였다. 3.1운동 당시 북경에 있으면서 상해로 옮겨 그곳에 있던 망명객들과 함께 임시정부 조직에 착수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 도산 안창호(좌)와 손정도 목사(우)

그러나 임시정부가 여러 파벌로 나뉘어 세력다툼이 거세지자 1921년 임정을 떠나 북만주 길림으로 가, 거기서 목회를 하며 교회를 거점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예배당과 자택은 의지할 곳 없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독립운동가들의 비밀아지트로도 사용되었다. 손정도 목사는 길림지역 조선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손정도 목사는 땅을 사서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하는 등, 농업공사의 조성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한인동포들의 삶의 터전이 될 ‘이상촌’을 건설하고자 하였으나, 일제가 만주침략 야욕을 노골화하면서 그의 포부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 후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이 악화되어 손정도 목사는 1931년 2월 19일, 49세의 나이로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파란만장했던 고난의 세월을 마감하였다. 장례는 2월23일 '재만감리교회장'으로 엄수되었고 신학교 동기 배형식 목사가 모금한 1천3백여 원의 헌금으로 길림성 밖 북산에 1백여 평 묘지를 구입하여 9월에야 유해를 안장하였다.

한편 길림에서의 손정도 목사와 관련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김일성 주석이다. 친구인 김형직이 사망하자 손 목사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 그의 아들 김성주(김일성)을 자신의 둘째 아들(원태)과 함께 길림 육문중학교를 다니게 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그리고 1929년 당시 김성주가 비밀 학생 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되자 옥바라지 하며,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이 일로 김일성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를 ‘생명의 은인’, '국부', '친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칭했으며, 임종 시에는 ’손 목사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한편 독일에서 유학한 손 목사의 장남 원일은 해군 창설의 주역으로, 해군 초대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여 ‘해군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는 아버지의 임종 당시 독일 상선 항해사로 인도양을 건너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는 ‘인도양 한가운데서 울고 또 울었다’고 회고하였다. 차남인 재미교포의사 손원태 박사는 길림 육문중학교에서 김성주(김일성)와 같이 공부하며 그를 형처럼 따랐는데, 남북 분단으로 헤어졌다가 1991년 김일성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60년 만에 상봉하였다. 그 밖에 3녀 손인실(YWCA회장, 통일원고문, 한국적십자사 부총재 역임)씨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독립운동의 공을 기려 손정도 목사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2001년 ‘손정도 목사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고 2003년 10월 13일에는 평양에서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손정도목사기념 평양학술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남북이 모두 인정하는 독립운동가였다. 목사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 '교직자의 간판을 가지고 한 생을 항일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량심적인 독립운동자'라고 인정받는 인물이다. 2007년 4월 국가보훈처는 손정도 목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한편 장남 손원일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차남 손원태 박사는 평양 애국열사릉(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 두 무덤이 상징하듯, 오직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신앙으로 리더십을 발휘하였던 손정도 목사의 나라사랑과 하나님사랑을 통해 남북은 둘이 아닌 하나여야 함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