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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부산진 일신여학교
박경진
2011. 2. 16. 15:52
부산 항일운동의 상징- 일신여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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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공적 기관에서 교육을 받지 못하던 시절, 초대 교장이었던 맨지스(B. Menzies, 1856-1935 (1891-1924:한국체류))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자녀를 양육하는 여성의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신념으로 버려진 아이 3명을 데리고 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일신여학교는 민족과 국가에 헌신할 수 있는 일꾼을 키우고 자주, 자립의 자세를 키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종교적 색채를 띤 덕분으로 일제가 식민지 교육을 강화했던 1915년까지 일제의 강력한 통제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분위기 속에 신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되었고 자연스레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정신을 일깨우며 항일 운동의 씨앗은 그렇게 뿌려졌다. 한편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부산지역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일신여학교 외국인 교사와 교장도 만세를 부르며 학생을 독려할 수 있었던 것도 학교가 일제의 탄압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1919년 3월 10일 오후 10시. 일신여학교 학생 김반수는 어머니가 혼수용으로 마련해준 옥양목 한 필을 가슴에 안고 주경애 선생을 찾아갔다. 방에 들어가 전깃불 대신 촛불을 켜고 창문은 이불로 가렸다. 가져간 옥양목을 자르고 학교 주변의 대나무를 베어 만든 깃대에 달아 100여 장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뜨거운 가슴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벅찬 가슴으로 새벽을 기다렸다. 마침내 1919년 3월11일 여명이 밝았다. 일신여학교 교사 2명(주경애, 박신연)과 학생 11명(김반수, 심순의, 김응수, 김난출, 김신복, 송명진, 김순이, 박정수, 김봉애, 김복선, 이명시)은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서 좌천동 거리로 들어섰다. 여학생들의 만세시위를 보면서 민중들도 합류하여 시위 군중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 일로 학생 전원과 여교사 2명은 부산진 주재소로 연행되었고, 학교는 20일 동안 휴교령이 내려졌다. 붙잡혀 심문을 당하던 중에도, 10대 소녀에 불과했던 학생 김응수는 "세 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하물며 우리나라를 돌려 달라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저항하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학생들의 항일 독립의지는 졸업식 거부로 이어져 주경애, 박시연 선생이 출옥한 후에야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16세 전후의 어린 소녀들이, 그것도 일제의 침략세력이 가장 깊이 뿌리박은 부산에서 항일 시위항쟁을 벌인 사실은 우리나라 3.1독립운동사에서 전국적으로도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3.11의거는 이후 동래고보 봉기(3월 13일), 동래 범어사 학생 의거(3월 19일), 구포시장 의거(3월 29일) 등, 부산·경남지역 항일운동에 불을 지피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처럼 일신여학교는 부산·경남지역의 근대 여성교육의 시작을 알렸다는 것 뿐 아니라, 3·11의거로 시작된 항일투쟁 정신이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편 일신여학교는 1925년 동래구 복천동으로 이전하면서 동래일신여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40년 5월 법인이 변경되면서 동래여자고등학교로 재개교했고, 1951년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05년 준공된 좌천동의 부산진 일신여학교 건물은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이자 부산경남 최초 신여성 교육기관으로 한국기독교사적 제7호,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0년 역사전시관으로 새롭게 단장하였다. 부산진교회 뜰에는 맨지스 부인의 공로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낯선 이방땅 조선을 찾아와 오늘의 부산, 경남지역의 기독교의 기초를 단단히 다진 호주선교사들, 그리고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던 조국의 광복을 위해 기꺼이 밑거름이 되고자 한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모두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들이었음을 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