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침례교회 소속 행곡교회는 울진군에서 최초로 건립된 교회이다. 1907년 11월15일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 선교사에 의해 조직된 대한기독교회(침례교회의 전신)의 문서 권서 전도자인 손필환이 행곡리를 방문하여 1908년 11월15일 남규백씨의 초당 채에서 설립예배를 드림으로 행곡교회가 시작되었다. 이후 그 앞의 터에 예배당을 새롭게 건축하였는데 그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1983년 신축한 교회의 머릿돌에 새겨진 『……침례교단 앞에 거룩한 숭고의 피를 바치신 고 전치규 목사와 고 전병무 목사, 고 남석천 성도 등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성전을 세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바칩니다.』라는 글귀에서 보듯이 행곡교회에서 세 명의 거룩한 순교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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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치규 목사 |
전치규 목사는 1910년 32세에 입교하여 1916년 9월 흥선골침례교회에서 열린「대화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말콤펜윅’의 비서로 성경번역에도 참여하였다. 1942년6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32명의 교단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원산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1944년 2월13일 함흥감옥에서 66세의 나이로 고문에 의해 순교했다.
행곡리에서 태어난 전병무(1888-1949) 목사는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는데, 모르는 한자가 없을 정도여서 '옥편'이라고 불렸다. 22세에 기독교인이 되었고, 29세 되던 1916년, 펜윅 선교사가 하던 성경공부반에 들어갔다.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여기서는 '성경 옥편'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26년에 교역자로서 감노(안수집사) 직분을 받고 행곡교회를 시무했다. 목사가 된 후에는 목회현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힘을 쏟았고, 특히 천국에 대한 약속은 더없이 큰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라고 외치며 고향 교회를 건축할 때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였는데, "천국에다 예치시키는 것이다"라며 자기 믿음을 보이기도 했다. 일제의 교회 탄압은 날로 더해져 고향을 등지고 간도와 만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던 때, 그의 가족들도 만주로 이민가기로 결정하고 장남인 전부흥이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끝내 거절하고 가족들과 생이별하고 혼자 남아 교회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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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무 목사 |
한편 전병무 목사는 1942년 6월, 교단 대표 32명이 원산감옥에 구속될 당시 전치규 목사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1944년 5월 출감하여 폐허가 된 교회당을 정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후 8.15 해방과 더불어 학원 설립과 후진양성 등 기독교단 재건에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제39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울릉도, 울진 두 구역으로 파송되어 순회목회 하였다. 당시 울진은 공산당의 활동 본거지였다. 이들은 전 목사를 저격 대상으로 삼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949년 10월 7일, 행곡교회에서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있는데 들이닥친 빨치산들에 의해 남석천 성도의 집으로 끌려가 그와 함께 총살당했다. 당시 전 목사는 62세, 남석천 성도는 26세였다.
행곡교회를 들어서면 입구 정면에 옛 건물이 있고, 좌측에 1983년 신축한 교회, 우측에는 부속건물이 있어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옛 건물은 한옥형 교회로, 건립초기의 남녀유별사상에 따른 남녀예배석의 구별이었으나 구별 해제에 따른 강대상의 위치변경 등, 한국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울진지역의 초기 한옥형교회라는 근대 건축사적 가치도 지닌다.(2006년 등록문화재 제286호로 지정) 또한 비상시 피신처 역할을 한 '지하 방공호'와 오래된 강단과 의자, 강대상 등의 자료들도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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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곡교회 전경 |
침례교 순교자 21명 가운데 3명이 이 교회 출신이다. 그래서 행곡교회를 ‘동해안의예루살렘교회’ 또는 ‘순교자기념교회당’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짧지만,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간 행곡교회 교인과 목사들이 있어 오늘의 울진에 기독교선교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오늘의 역사적인 한국교회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행곡교회 옛 건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