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신문 연재)
60. 빈민, 나환자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
박경진
2010. 7. 23. 10:43
성지순례 | 빈민, 나환자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 | ||||||||||||||||||
| ||||||||||||||||||
한편 1909년 4월, 광주의 오웬(C.C. Owen) 선교사가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은 포사이드(W.H. Forsythe) 선교사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이때 최흥종이 영산포까지 마중을 나갔다. 함께 광주로 향하던 중에 죽어가는 한센병(문둥병)환자를 만났고, 포사이드는 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왔다. 그리고 여인을 광주 선교부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다른 환자들의 반발로 벽돌 굽던 가마터로 옮겨갔다. 이때 악취가 진동하고 손발에서 고름이 나오는 여인을 두 손으로 안고 가다가 여인이 지팡이를 놓치자 포사이드는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다 끝내 지팡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이 일로 최흥종은 “서양 선교사는 문둥병자를 끌어안기도 하는데 나는 왜 지팡이도 잡지 못했는가?” 하며 고뇌하다가, 그러한 힘은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진짜교인’ 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 후 “양림동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치료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은 급히 양림동에 세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해 7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정식으로 요양원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한국 최초 한센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 의 시초이다.
같은 해 최흥종은 광주 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었다. 그리고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면서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 전도사 일을 하였다. 그러나 포사이드와의 만남으로 변화된 최흥종은 무엇보다 광주나병원 일에 열심을 내므로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운동에도 열심이던 그는 1919년엔 서울로 가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YMCA)를 창설하였으며, 1921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북문밖교회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8,15해방과 함께 강요에 의해 전남건국위원장직을 맡았으나 14일 만에 사퇴하였다. 최흥종은 한국나예방협회, 삼애학원, 호혜원 등을 설립하여 걸인과 병자들을 위한 구제 사업에 앞장섰다. 그는 “이제 살만큼 살았다”며 1966년 2월10일부터 단식에 들어가 95일 만에 8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광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는 광주 인근 걸인들과 무등산에서 온 결핵환자, 여수와 나주에서 올라온 한센병 환자 등 인파가 몰려 “아버지, 아버지”하며 통곡하였다. 이처럼 최흥종은 낮은 곳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테레사 수녀와 같이 거룩한 삶을 살다간 한국교회의 위대한 인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