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십리교회

100세사신 조복흥장로님 천국환송식

박경진 2010. 2. 12. 11:55

  조복흥장로 100세, 천국환송예식

     일시: 2010. 2. 11. 05:00,      장소: 삼성의료원장례식장,    주관: 왕십리감리교회 장례위원회,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시 90:10) 하였는데 조복흥장로님은 강건의 나이를 뛰어넘어 20년을 더 사시면서 100세의 축복된 장수를 누리신 후 평안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어렵고 힘든시대를 사셨다. 6/25의 공산당과 맞서 신앙을 지키신 장로님은 끝내 부군이 납북되는 뼈아픔을 겪으면서도  어린 자녀들 양육하기에 바빠서 그져 가슴속 깊은 곳에다가 묻어 두고 살수 수밖에 없었다.

 

  왕십리교회를 섬기신 세월이 72년, 28세 때 왕십리교회 나오신 후 100세까지 사시면서 교회안의 구석진 곳까지 장로님의 손때가 묻지않은 곳이없다. 내가 장로취임식을 할 때에 취임인사말 하는것을 보고 조복흥 장로님이 눈물을 흘리셨다. 그때 나는 장로님께 왜 눈물을 흘리셨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원로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30여년을 시무 장로로서 헌신해야할 것을 생각하니 애처러워 눈물이 나더라고 말씀을 하시었다. 조장로님은그후 24년을 사시면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지도와 격려와 모범을 보여 주셨다. 조복흥장로님! 이제 영원한 안식처인 주님의 품에서 길이 편히 쉬소서. 

 

 

 

왕십리교회장례 순서담당   사회: 이영길목사,   기도: 박경진장로,   조가: 왕십리교회찬양대,  약력소개: 윤만의장로,   말씀선포: 김성철담임목사,

추모사: 남상학장로,   인사및 광고: 이상인장로, 김성호유족대표,   축도: 김성철목사,  장례위원: 왕십리교회장로 일동

 

故 조복흥장로 천국환송예식 순서에서 대표기도하는 박경진장로

 

 

 

故人의 약력소개  윤만의 장로  :  1911. 9. 2. 황해도 신천군 고동면 송현리 100번지에서  부: 조재원, 모: 김음전의 막내로 출생, 

개성 호스돈여고졸업, 전주기전여학교 교직생활,  1938년  28세에 김치갑과 결혼, 1980년 2월:성동지방회 장로안수, 1981년 성동지방회 장로은퇴  

 

유가족:  장남: 김성호 (이영희)   차남: 김명호 (김영희)   장녀: 김영자 (외손: 강보임, 강보정)   손자: 김인우, 인웅, 인희, 인아 

 

 

고 조복흥장로 천국환송예식 순서에서 김성철담임목사님의 설교 말씀

 

<追慕辭>


행복한 죽음 - 조복흥 장로님 영전에


존경하는 조복흥 장로님,

본향이 그리워 훌쩍 떠나시던 날부터

섭섭한 마음을 드러내듯

연3일 비가 내렸습니다.


저는 처음 장로님이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습니다.

떠나시기 전 진작 한번이라도 뵈었어야 하는데...

너무 죄송한 마음으로 울적하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장로님과 저와는 남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 장로님은 저의 어머님과는 돈독한 우정을 나눈 사이였습니다.

장로님이 교회 가실 때 길목에 있던 저희 집에 들르셔서

저의 어머님과 같이 교회에 가시고 형님 아우지간의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1965년 저의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저의 4남매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참 걱정이라”고 하시며 

남다르게 위로하시고 그 뒤로도 각별히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또 장로님의 둘째 아들 되는 김명호 선생과 제 동생 남상우 장로와는

무학초등학교,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1980년도에 장로님과 저는 함께 왕십리교회 장로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장로님의 별세 소식은 저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로님은 이 땅에서 누구보다 많은 복을 누리시고

그토록 그리던 천국에 가셨기에

장로님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먼저, 장로님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장수의 축복을 누리셨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 했는데

장로님은 ‘강건한 팔십’을 지나 무려 20년을 더 사셨습니다.

백수(白壽)를 누린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마지막 순간에도 고통을 모르시고 평안한 모습으로 가셨으니

그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장로님은 자녀들의 극진한 효도를 받으신 분입니다.

한 때 병환이 짙어 어려운 고비를 겪으신 일도 있었지만

한의사인 아드님을 비롯한 자녀와 손자,손녀들의 극진한 효성으로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효성은 남편을 일찍이 여의고 홀로 사신 외로움을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귀한 축복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올곧은 신앙의 사람으로 <믿음의 승리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장로님은 1928년부터 72년 동안 꽃재동산에서 믿음을 키우셨습니다.

그래서 장로님의 믿음의 역사는 100년 꽃재교회 역사와 맥이 닿아 있습니다.

그 결과로 장로님은 왕십리감리교회 제1호 여자 장로님으로 피택되셨으며,

꽃재유치원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신실하게 몸 된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본래 총명함을 타고 나신 장로님은 고등교육을 받으시고,

한때 교직생활도 하셨기에 교회일을 처리하는데 늘 명철하고 사리(事理)가 분명했습니다.

은퇴하신 후에는 교회 청년들의 바른 신앙을 위해 염려하셨으며,

여자 어르신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믿음의 상담자>를 자임하셨습니다.

휴식공간의 화단을 알뜰히 가꾸는 것도 장로님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장로님이 강남 포이동에 있는 <큰사랑병원>에서 요양하고 계실 때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마다 장로님은 성경읽기에 몰두하고 계셨고,

진리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요양 중인 할머니들에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금 슬픔의 영결예배를 드리기보다는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기쁨으로 천국환송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

이제 뵙고 싶어도 뵈올 수 없기에

우리들의 마음이 허전해 옴을 금할 수가 없고, 몹시 그립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러봅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존경하는 조복흥 장로님,


이제 사랑하는 가족들,

믿음의 후배들의 전송을 받으며

이 새벽, 새벽기도 가시는 발걸음으로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편히 쉬십시오. 


2010. 2. 11 고 조복흥 장로님 천국환송예배에서


                                        - 남상학 장로

 

 

경조위원장 이상인장로의 인사및 광고를 하였다 

 

큰 아들 상주가 감사 인사를 하고있다.

 

김성철 담임목사님의 인사와 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