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평신도주일 오후예배설교)
성천교회 평신도주일 오후예배 설교
제목: “주제넘은 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9:23)
학생들에게 국영수, 즉 국어/ 영어/ 수학은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주요 입시과목입니다. 옛날이지만 저희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이 국영수 중에서도 특히 국어와 수학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은 국어를 잘 해서 주제 파악을 하고, 수학을 잘 해서 분수를 알라는 것이었나 생각을 해 봅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실제로 저는 아버지한테서 주제파악을 하고 살라는 말씀을 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주제넘은 놈” “주제도 모르는 놈” “주제넘게 스리. 쯧쯧쯧.” “주제도 모르면서” “시건방지게 굴지마라” “주제파악 좀 해라” “꿈도 꾸지 마라” “분수에 맞게 살아라.” “분수도 모르는 놈.” 이러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쳐다보지도 말라.” “제발 가늘게 먹고 가는 똥 싸라.” “세상만사 불혀 튼튼히”.......
그때는 그 말의 깊은 속뜻을 알 리 없으니 큰 관심 없이 그냥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저 안정되고 평범하게, 팔자에 타고난 대로 살라는, 어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훈계이겠거니 하며 살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어머니가 낳은 10남매, 그것도 아들 4형제 중에서는 막내인데 눈 하나가 감겨져 있는 채로 태어났으니 손이 귀한 집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생겨먹지도 않았으니 아버지가 저에 대해 큰 기대를 않으신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아침에 아버지가 일터에 가시다가 꿩을 한 마리 발견하고 집에 가져와서 배고픈데 볶아 먹으라고 했답니다. 전선주가 처음 생기던 때, 꿩이 날아가다가 전선줄에 걸려 날갯죽지가 부딪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그때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죽은 꿩의 한쪽 눈이 감겨져 있는 것이 너무 선명하게 머리에 남았었는데, 그 후 애를 낳고 보니 아이의 눈도 죽은 꿩의 눈처럼 감겨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누구였겠습니까? 하루 이틀 한주 두주 아니 청소년 시절 내내 눈이 하나는 떠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나이 스무 살까지 눈을 하나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놀림감이었습니다. 그저 생각없이 하는 말이 저에게는 큰 상처였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한쪽 눈으로 적응하였기 때문에 보는 데는 큰 불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자라는 것 때문에 겪는 열등감은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집 안에서 심지어 형제들 까지도 눈 찌그랭이라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저 놀려대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막 무시하고 깔보았습니다. “야 ! 너는 반쪽이잖아.”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놈이” “너는 50% 밖에 안 되잖아, 좀 빠져라.” 하면서 놀려대기 일쑤였습니다. 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같이 놀아주는 동무가 있겠습니까, 어린애가 겪는 수치심, 창피, 부끄러움에서 오는 열등감, 요즘말로 ‘왕따’ 그래서 늘 외톨이 였습니다. 소극적이고 표현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렇게 비록 놀림감이었으나 공부는 1학년 때부터 항상 일등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열등감을 공부로나마 해소하려는 나름의 고육지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그때는 공부만 잘하면 반장은 따 논 당상이었습니다. 그러나 6학년 때 전교회장을 뽑는데 한 표 찍어달라고 전교생들 앞에서 내가 선거유세 에서도 나를 찍어 달라고 해놓고는 막상 내가 표를 찍으러 들어가서는 상대방 1반 반장인 김용응이를 찍었습니다. 막상 투표하러 들어가니 ‘야! 너는 반쪽이잖아. 전교회장은 두 눈 가진 애가 해야지.’ 하는 내 속에 깊게 뿌리내린 열등의식이 올라와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투표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천대와 놀림가운데 못난이라고 스스로 열등의식 가운데 자포자기 하며 성장하던 내가 글쎄, 교회장로가 되었답니다. 그 가난하고 때 거리가 없이 굶어가며 살던 삶에서도 감리교회의 목회자를 꿈꾸며 신학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시골 촌놈이 서울에 와서 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서울대학, 연세대학 출신의 인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육군쫄병 출신과 ROTC 장교출신이 맞붙어서 겨루었는데 12,000여명의 장로님들이 글쎄 쫄병을 전국장로회연합회장으로 두 번씩이나 압도적인 표차이로 뽑았다는 거 아닙니까. 무엇이 그렇게 했습니까. 오직 예수뿐인 줄로 믿습니다.
저는 6. 25전쟁과 함께 1.4후퇴 피난민들이 제가 살던 곳 성연초등학교 교실에 피난 보따리를 놓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그 대열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피난민들의 보따리에서 떨어진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 로다.” (합 3:19)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될 수 있도록 열등한 인생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주신 제 인생의 멘토 두 분이 계십니다. 한 분은 저의 청년시절에 제 신앙을 바로잡아준 박상호 전도사님입니다. 그분은 함석헌 선생의 영향을 받은 이로 40일 금식기도를 두 번이나 하셨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제 신앙의 기초가 닦아졌습니다. 그때는 주일 아침과 금요일 저녁은 철저하게 금식하였고 매일새벽 냉수마찰하고 아무리 추워도 반드시 얼음을 깨고 냉수목욕하고 새벽기도를 해야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그분을 하나님의 대변자, 하나님의 사자라고 믿고 존경하며 말씀을 절대 순종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저의 결혼 중매도 그 전도사님이 하셨습니다. 얼마나 믿었던지 첫 번 맞선보러 가면서 2.5돈짜리 금반지를 약혼예물로 사가지고 갔습니다. 그만큼 모든 면에서 신뢰하는 분이었습니다. 선 보러 가는데 하루 종일 차타고 찾아가 그쪽 목사님 댁에 들어가서 앉아 있는데 문밖에 왔다 갔다 하는 여성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준비해 간 약혼반지를 한번 만져보고는 주머니 안쪽 깊숙한 곳에 넣어 버렸습니다. 손톱만한 도민증 사진한장 달랑 보고 찾아왔는데 문밖으로 보이는 여성은 제가 마음속으로 그렸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나는 키도 작고 왜소한데 비해서 이 규수는 좀 넉넉한 풍채였습니다. 그래서 살그머니 금반지를 꺼내서 안주머니 깊숙이 넣고 말았던 겁니다.
밖을 내다보던 나는 그만 머리가 혼란해졌습니다. 괜히 왔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때 유영택 목사님이 “박 선생! 한 선생!” 우리 두 사람을 부르며 예배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은 (빌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셨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조건 믿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설교 요지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은 죄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혼란하던 머릿속이 피동적으로 정리되면서 나도 모르게 그 말씀에 “아멘” 하였습니다. 그리고 번민을 접고 아예 마음을 바꿔 먹으며 속주머니에 깊이 넣었던 금반지를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꺼내어 겉주머니로 옮겨 넣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목사님은 따로 두 사람만 예배당 안에 가서 조용히 얘기하라고 시간을 주었습니다. 성경말씀에 따르기로 마음먹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는 상대방이 나를 싫다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있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 죄가 되지만 나는 오히려 상대방이 아니라고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나의 단점, 부정적인 면만을 골라서 자꾸 말합니다. 군대도 안가서 언제 군의 영장을 받을지, 입대하게 될른지 모른다. 사는 곳은 바닷가여서 모기 각다귀 등 여름이면 해충이 많아서 고생이 대단히 극심하다. 등등……
제 마음 속에 열등감으로 자리하고 있던 내용들이 그때는 마치 대단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내 쪽에서 끊을 수 없으니 상대방으로 하여금 퇴짜를 놓게 하려는 얄팍한 심보가 발동했던 겁니다. 자신은 끝까지 좋은 인상으로 남고자 하는,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나쁜 남자>였습니다.
아무튼 나에 대해서 부정적인 조건만 고장 난 전축마냥 계속 이어지면서 얘기를 하였지만 상대방은 그저 “예-. 알겠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하고 도무지 “아니요”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지요.”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에 저는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의 믿음 없음을 고백하며 주여, 하였습니다. 그 상대방 규수가 바로 지금의 제 아내 한춘자 권사입니다. 한때나마 제 마음으로 많이 밀어내려 했었지만, 그 후 지금까지도 한 권사에게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는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결혼해서 첫딸을 낳고 군에 입대하여 36개월을 홀로 보낸 것 하며, 제대 후에 어린 아들 딸과 함께 네 식구가 1969년 11월 1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무작정 상경하여 지금까지 고생한 것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초창기 난곡동 철거민촌에서 15년동안 글쎄 이사를 25번 다녔습니다. 저도 팔불출이 한번 되어 볼까요? 처음 보는 목사님들이 한결같이 박장로는 한 권사 때문에 복 받았다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는 절대비밀입니다. 한 권사는 모르고 45년을 살았으니까요.
맨 주먹으로 시작한 서울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는 하루도 맥없이 앉아 놀면서 실업자라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서울생활 시작하면서 자전거도 혼자서 겨우 타는 실력으로 글쎄 쌀집에 취직하여 쌀을 배달도 하였습니다. 난곡동 철거민 촌에서 막노동, 리어카도 끌고, 페인트칠 잡부, 건축현장의 잡부근로자 등 수없이 많은 일거리를 찾아 다니면서 때로는 보따리장사도 해보고 개인회사종업원 노릇도 해보고 문패샘플 가방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는 외판원 생활도 수없이 하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전박대도 많이 당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함께해 주셨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손길이 늘 함께하셔서 무에서 유를 일구게 하셨고 믿음으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 오늘날 100여명의 사원과 함께 600만부의 캘린더를 생산하는 기업체를 일구도록 축복하셨습니다. 계속하여 사업영역을 확장하여 양질의 신앙도서를 출판하고 각종 팬시용품을 제작하여 5만교회 천만의 성도들에게 양질의 교회용품을 생산 보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춘 회사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성화 카렌다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저는 82년도 처음으로 일본을 견학하였고 83년도에는 기독교문화의 화려한 꽃을 피운 유럽을 견학하였습니다. 건축양식에서부터 거리문화 패션문화 생활양식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기독교문화의 토착화된 모습을 눈과가슴으로 견학하면서 의식전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단번에 시야가, 확 트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유럽의 기독교문화를 견학하면서 사도바울에게 나타났던 마케도니아사람의 그 손짓이 얼마나 위대하였던 가를 실감하며 몸에서 전율을 느끼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생각하면 등에서 소름이 쫙-끼쳐 옵니다.
그렇게 유럽을 다녀오던 그 해에 성화그림 6장 그려서 만든 아이디어 성화캘린더 한 가지를 가지고 속된 말로 대박을 터트렸습니다. 방산시장에서 남의 사무실 옆에다 책상 하나 놓고 맨 주먹으로 시작한 사업이 일취월장 발전하면서 지금은 120여명의 사원들이 신설동 1,500여 평 사옥에서 모든 생산품 기획에서부터 디자인, 완성품 판매, 영업 관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수동 1,500여 평의 공장에서는 인쇄시스템과 제본시스템을 갖추고 풀가동하여 캘린더, 기독교용품일체, 각종 인쇄물과 도서출판까지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설동 기독교백화점에서는 기독교용품과 모든 서적일체를 오프라인, 온라인으로 국내 2만여 교회와 전 세계를 커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저희 회사도 크고, 작게 여파가 없지 않습니다만, 지난 1996년부터 올해까지 14년동안 변함없이 해 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외입양아초청 모국방문행사 입니다.
그래서 내년이면 제 15주년이 됩니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이 일본을 빛냈던 것처럼 이들 가운데서도 대한민국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아들딸 노릇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4년째 정성과 사랑으로 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불쌍한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슨 이권 때문에 선심 쓰는 것이 아닌가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2주간의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는 눈물을 펑펑 쏟으며 감사하다고 자기들도 이다음에 그와 같은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곤 합니다.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자아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 마다 저희도 자부심을 느낍니다. 1999년도에 왔던 사라몰간이라는 18세의 여 청년의 자기소감 발표에서 나는 눈물겹도록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가 하는 말이 어느날 미국인이 자기를 보면서 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을 때 답답해서 울음이 터져나올것 같았다고 하면서 그가 대답에서, 미국사람, 중국사람, 일본사람, 한국사람, 입을 열수가 없었습니다. 국적이 분명 미국인이지만 자아를 모르는 존재였는데, 이제 돌아가면 분명히 자기는 대국이라는 중국인도, 일등국민이라는 일본인도, 아니고 당당하게 대한민국사람, 한국에서 입양된 미국인이라고 말하겠다고 하면서 눈물을 흠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곧 그들의 아이덴티티, 자아를 발견한 자부심으로 가득 찬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격하고 자부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일은 돈이 얼마가 들어가도 꼭 계속 하려고 합니다.
-결 론-
제가 올해로 70세가 되었습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제 주제대로 살았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들을 참 많이 경험 하였습니다. 기적이란, 거창한 이름을 부치지 않더라도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 졌습니다.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경제적인 축복, 자녀손의 축복, 가정적으로나 교회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한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타고난 환경을 뛰어넘어 넘치도록 부어주신 믿음의 역사였다고 믿습니다. 한편 고난과 역경은 나에게 주어진 현실이었지만 믿음으로 기도하며 극복하다보니 이겨나갈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 보답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불가능한 환경에서도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믿음이 힘이 되어 감당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에 예수님의 등에 업혀져 상황과 한계를 믿음의 능력으로 거뜬히 뛰어 넘을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하신말씀이 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열등감을 뿌리째 뽑아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타고난 주제대로 살게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주제넘은 꿈” 을 주십니다. 뛰어넘을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을 반드시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그러했고 요셉이 바로 그런 꿈을 성취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자기주제를 뛰어넘어 꿈을 성취하였습니다. 우리주님은 능력 밖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미리 설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믿음 없는 모습입니다. 큰 믿음으로 “주제와 분수”를 뛰어 넘으십시오. 여러분도 주제를 뛰어넘는 믿음, "주제넘은 꿈" 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마가9장 23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