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교 특강
한국신학교 특강을 오늘 3번째 하였다.
성경: 단12장 3절 (영원토록 빛나는 삶)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별은 어두울수록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제가 애굽(이집트)에 가서 시내산 등정을 할 때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시내산을 올랐는데, 그때 본 별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옛날 시골에서는 그런 별빛을 보면서 새벽기도를 다녔습니다만, 반딧불과 별빛이 사라진지 오래인데, 지난겨울 시내산에서 쏟아질 듯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 별들을 보면서 저는, 저런 별과 같은 삶,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살 수는 없을까,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다니엘서 12장 3절,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저는 이번 추석명절에도 어김없이 자녀들을 데리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역>에서 참배의 일환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명절 때마다 늘 다른 선교사의 얘기를 들려주지만, 헤론 선교사 앞에서는 매번 기도를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훌륭한 제자였으며, 참으로 위대한 선교사요, 용기 있는 선교사, 별과 같이 빛나는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테네시대학교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촉망받는 학생이었습니다. 테네시대학교에서 교수로 남아달라는 간곡한 부탁도 뿌리치고 조선선교사를 제1차로 지망을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당부하신 명령을 따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삶의 보금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대학의 교수자리도 기꺼이 버렸습니다. 그의 약혼녀였던 깁슨은 나는 안가겠다고 여기서 결혼하고 애기 낳고 잘 살자고 붙들고 말렸지만, 헤론은 제1차로 조선선교사 지망한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약혼녀 깁슨을 설득하여 함께 떠났습니다.
미지의 땅, 아직 여명의 동이 트기전 캄캄한 나라, 문명을 모르고 무지하고 가난하며 전염병이 창궐하던 나라, 병원이나 약국도 없는 미개한 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전기불이 없으니 밤이면 총총한 별빛만이 쏟아지는 이 조선을 향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던 위대한 선교사, 그가 곧 헤론 선교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매년 일년에 두 번씩 명절 때면 찾아가서 그저 감사하다고 너무너무 고맙다고 당신은 영원히,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 빛나야 할 사람이라고 목이 메도록 부르고 싶은 찬송도 억제하면서 성묘를 하며 아이들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자신의 영화나 명예나 재물의 관심을 버리고 호화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 땅에 와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뼈를 묻기까지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의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 경제대국들과 어깨를 겨루며 잘 살게 된 것이 다 누구의 덕입니까, 참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살기 좋은 나라는 세계 어디에 가도 없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 땅에 와서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깡패, 노름꾼, 사기꾼에 술주정뱅이 등 온갖 망나니짓만 골라하던 사람을 변화시켜 노벨상 대상자를 추천 할 권한이 나에게 있다면 그를 추천하겠다고 했던 캐나다 선교사 게일(J. S. Gale, 기일)에 대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게일 선교사가 누구인지를 살펴보면
게일은 25세 되던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기독청년회 지원으로 그해 12월 15일 내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1892년 4월 7일 헤론(John Heron, 1858- 1890)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 선교사와 결혼하고 이름도 기일(奇一)이라는 한국명으로 개명하였습니다. 한편 곤당골에 신방을 꾸몄던 게일과 깁슨은 무어 선교사와 손을 잡고 곤당골교회를 도왔는데, 이 무렵 기퍼드와 그래함 리(이길함)가 천민들을 모아 놓고 목회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게일도 연동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1894년 연동교회를 개척했던 그래함 리는 마펫과 함께 평양 선교부로 이전해 갔으며, 기퍼드 선교사도 열심히 연동교회 선교에 힘을 쏟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1900년5월부터는 게일이 연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 되어 이끌게 되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부인 깁슨이 결핵으로 어려움을 겪자 두 딸과 함께 잠시 스위스 로잔으로 보냈습니다. 요양이 다 끝나자 1907년 서울에 다시 안착을 하며 연동교회 교인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08년 3월 29일 깁슨은 결핵으로 결국 삶을 마감하므로 본 남편 헤론의 묘 옆에 자리를 마련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게일은 1910년 영국실업가의 딸 루이스와 다시 재혼을 하였고, 1927년 5월 27년간의 연동교회시무를 마치고 정년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습니다.
게일의 선교활동 중 한국에 심은 큰 업적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특별히, 한국의 언어와 문자 및 교육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습니다. 선교의 열정만 가지고 조선의 선교사역에 뛰어들어 현장목회에 적응을 너무도 잘하며,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지만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보다 훨씬 많은 책을 쓰고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의 많은 저서 중에 [코리언 스케치]라는 책은 서방에 한국을 알기기 위하여 쓴 책인데, 구한말의 상황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고, 특히 일본이나 중국과 차별을 확실하게 해준 책입니다. 그 책에 나오는 한국문화에 대한 일화 중에, 게일 선교사가 순회전도를 하는 중 어느 집에서 고기를 대접해 주었는데 배가 고팠던 게일은 그 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무슨 고기가 이렇게 맛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개고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말을 듣고 매우 놀랐지만, 그 후로 노란 개만 보면 군침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게일은 우리 문화를 잘 이해하는 면모를 보였습니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으며 말년인 1925년에는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사역私繹으로 성경 신구약전서를 한글성서로 번역하여 완역 출판하였습니다. 특히,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天主)”로, 마펫과 기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게일은 동양사 연구에도 일가견을 이루어 특히 한국의 고전을 영역하여 세계에 소개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그 중에는 《한국풍속지》 《구운몽》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이 있고, 한편 《천로역정(天路歷程)》을 한글로 번역하여 한국에서 전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이 밖의 주요 저서에 《한국어의 변천》《한국근대사》《한양지(漢陽誌)》《한국결혼고(韓國結婚考)》등의 역사적인 저서와 번역으로 한국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길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게일의 업적을 찬양했고, 고종 황제도 게일의 선교25주년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착한목자’라는 칭호를 쓰면서 1913년 김원근(1870-1944) 서예의 대가에게 붓글씨를 쓰게 하여 게일 선교사에게 하사하였습니다.
한편, 게일 선교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갖바치출신 고찬익 (高贊翼1857~1908) 장로입니다.
연동교회가 시작된 곳은 바로 지금의 종로5가 지역으로서, 연못골(연지동), 찬우물골(효제동), 방아다리골(충신동) 등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최하위 층인 상인, 갖바치, 하급병졸 등 천민의 집단촌이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무어 선교사와 서상륜 등이 복음을 증거하며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선교사들이 어렵게 병을 고쳐주면서 한 사람씩 얻은 교인들로 1894년 교회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연동교회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연동교회는 1900년 게일 선교사가 초대당회장을 맡으면서부터 비로소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에 앞서 게일선교사는 1890년 함경도 원산에서 전도활동을 하던 중, 한 술주정뱅이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곧 고찬익입니다. 고찬익은 가죽으로 신발을 만드는 갖바치 최하위 천민이었습니다. 그는 평안도 안주 출생으로 30세를 전후해서는 원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신분을 비관하면서 노름꾼, 사기꾼, 술주정뱅이 등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관가에 끌려가 수없이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빚쟁이에 시달리며 매를 맞고 쓰러져 한때 벙어리가 되기도 하였으며 음독자살을 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게일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는 제목의 전도지를 받고 돌아와 읽어보다가 잠을 자는데 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깜짝 놀란 그는 "고... 고...고... “라고만 대답을 하였습니다. 최하위층 천민인 그에게는 이름의 존재가치가 없었습니다. 천민은 이름이 있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민에게는 양반집 아이들까지도 절대 존댓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그저 아이들도 나이 많은 노인 천민을 보면서 “고서방 밥 먹었는가?”하면 최고의 예우였습니다. 그런데 이름 없이 살아가는 그에게 다시금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음성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떨리고 무서워서 “내 이름은 고가이며, 싸움꾼이고, 술꾼이고, 망나니올시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를 용서하고 살려만 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흰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그를 막 때리며 “이제부터 너는 내 아들이다”고 말하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는 꿈을 깨고 나니 꿈이 하도 이상해서 게일선교사에게서 받은 전도지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게일선교사를 찾아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그에게 앞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는 삶을 살라는 뜻으로 찬익(贊翼)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가가 마침내 고찬익(高贊翼)이 되었습니다.
이후 고찬익은 게일이 서울 연동교회를 맡아 목회할 때 동참하여 게일의 은혜를 갚기 위해 전도를 사명으로 삼고 종로 5가의 갖바치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전도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의 열심 있는 전도로 연동교회주변 천민들은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자기들을 알아주고 사람취급을 해주며 병나면 양반들과 똑같이 치료하고 고쳐주니 이보다 큰 희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양반들과 함께 자리를 하면서 예배할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어서 고찬익의 말에 모두 따라나섰습니다.
마침내 연동교회는 매주 새 신자가 등록됐고 1900년 게일선교사가 연동교회의 초대 당회장이 되면서 그에게 조사의 직함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05년 장로선출을 위한 공동회의에서 고찬익은 연동교회에서 여러 양반들과의 경쟁하여 당당하게 초대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종로 5가 일대의 천민들은 자신들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갖바치 백정 등 하위계층 사람들이 연동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이 장로선거에서 낙선을 하자 일부는 교회를 이탈해 봉익동에 묘동교회를 설립하여 양반들끼리 나가는 아픔도 있었습니다.
한편 게일선교사는 고찬익 장로를 장차 한국교회의 유능한 목사가 되게 하기 위하여 1908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등록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고찬익 장로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나가서 전도하기를 남달리 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학업에 매진하던 고찬익장로는 신학교 공부를 하던 중 안타깝게도 식중독에 걸려서 목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고찬익 장로를 자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꼽으며, 자신에게 노벨상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를 추천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게일은 고찬익 장로를 보면서 교회의 지도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는 양반이나 천민의 구별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기한국교회는 신앙의 척도를 학문의 깊이보다 생활신앙으로 드러내는 변화의 삶으로 크게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폐단을 과감히 단절하며 변화되는 모습으로서 급격한 전도가 이루어졌으며 그러면서 어두웠던 시대에 기독교인들 중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암울했던 시대에 등불과 같이 기독교인들의 생활신앙은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을 보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별과 같이 빛나는 기독교인들을 부르시는 이때에 헤론이 조선선교사로 가게 하옵소서. 나를 보내 주소서 하였던 것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성큼 나설 자 누구일는지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