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83>하나님의 열혈군사-순교자 박관준 장로
83. 하나님의 열혈군사-순교자 박관준 장로
일제 강점기 한국교회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함으로써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했던 평신도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적 인물로 박관준 장로(1875~1945)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의사이면서 장로로 가장 용맹하고 과감한 투쟁을 전개했다.
박관준은 1875년 4월 13일 평안북도 영변에서 지주였던 박치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불행히도 형 셋이 모두 어릴 때 죽어서 그는 집안의 대를 이을 독자가 되고 말았다. 부모의 지극정성이 그에게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유불선의 경서와 동학서적 등을 탐독하는 등 학식이 깊었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얼마 후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면서 방탕한 생활로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박관준 장로(1875~1945)
그러던 중, 30세 되던 1905년 어느 가을날 밤 비몽사몽간에 “절벽유위 혈벽립(絶壁唯危 血壁立: 절벽은 위태로울 뿐이니 피의 벽에 서라)”이라는 영음을 듣게 된다. 이때부터 고민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자제하다가 마침내 교회를 찾아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게 되었다. 기독교인이 된 그는 1907년에 영변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박관준은 신앙의 열정을 갖고 영육의 병을 함께 고치는 사람이 되겠다며 1912년부터 3년간 서울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하였다. 1915년경 고향인 평북 영변으로 돌아온 그는 제중의원이란 간판을 걸고 병원을 열었으며,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전도를 쉬지 않았다. 영변, 안주, 개천, 평양 등의 산간오지에 위치한 무의촌(無醫村)을 다니면서 의료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아울러 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겼다.
그는 1934년에는 평남 개천읍에서 십자의원을 개원하였고, 개천읍 장로교회에서 초대 장로가 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병원 입구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진찰실 벽에는 “나는 육신의 병자보다 영혼의 병자취급을 더 갈망한다.”라는 친필족자를 걸어두었을 만큼 영혼구원에 큰 관심을 갖고 전도하고 기도하면서 의술을 베풀었기 때문에 환자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당시 일제는 교회마다 일본 순사들을 보내 끈질기게 교회를 감시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한국 교회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결국 1938년 9월 장로회 27최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화 하는 가결하고 만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박관준 장로 순교추모비
박관준 장로는 이러한 참극이 있기 전에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나이 60세가 되던 1935년 봄, 기도 중에 “나를 위해 피를 흘릴 자가 누구냐?” 라는 음성을 듣고 지체 없이 “제가 흘리겠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그래? 그러면 너는 나의 십자가 군병이 되어라.” 라는 음성을 다시 들었다. 때문에 그는 총회의 결의가 있기도 전부터 신사참배 저지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결사 항쟁을 각오하였다. 그러한 일사각오의 저항으로 그는 5~6차례에 걸쳐 조선총독부의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멈추지 않았고, 결국 수차례 투옥되었다. 그는 1938년 장로회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순교의 각오를 담은 시를 써서 신사참배 거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人生有一死何不死於死 (인생 일대에 한번 죽음이 있으니, 어찌 죽을 때에 죽지 않으리오.)
君獨死於死千秋死不死 (그대 홀로 죽을 때에 죽었으니, 죽었어도 천추에 죽지 않았도다.)
時來死不死生樂不如死 (죽을 때가 와서도 죽지 않으면, 살아도 즐거움이 죽음만 못하리라.)
耶蘇爲我死我爲耶蘇死 (예수께서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님 위해 죽으리라.)
그는 1939년 3월 22일, 당시 보성여학교 교사였던 안이숙 여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신학교에 재학중이던 아들 박영찬과 함께 일본 정계 요인들을 찾아가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신사참배 강요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며 일본의 멸망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는 개회중이던 일본 제74회 제국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서 ‘종교단체의 국가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을 상정, 통과시키려 할 때 번개처럼 뛰어나가 큰 봉투를 아래층 의사당 안으로 내던지며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다”라고 외쳤다. 봉투 안에는 다섯 항목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 셋째 항목은 “종교법안이 통과되어 정부가 종교를 지배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일본에 천재(天災)를 내릴 것이다.”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그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던 박관준 장로는 1941년 봄 천황에 대한 반역죄로 평양형무소에 다시 투옥되었다. 5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40일간 금식기도를 드리다가 쓰러져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닷새 만인, 1945년 3월 13일, 8.15 광복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우리나라는 앞으로 이사야 11장 10절∼16절의 말씀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 끝까지 신앙을 잘 간직하다 앞날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7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유해는 평양장로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며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이 재판기록 등을 통하여 밝혀져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용인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마당에는 박관준 장로의 투옥 전 지은 시가 새겨진 순교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자신의 유고시에서 고백한 것처럼, 그는 죽을 때에 죽음으로써 예수님에게로 나아갔다. 박관준 장로의 순교적 신앙과 용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여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신사참배 거부항쟁 동지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굴의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 글 : 진흥투어(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관장 박경진 장로 (02-2230-5151)